고서를 연구하는 서지학자들이 목판본과 금속활자본을 구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목판본은 글자를 자세히 보면 나무결이 보이기도 하고 갈라진 흔적이 나타나기도 한다. 반대로 금속활자본은 갈라진 것은 물론, 결이 보이지 않아 깔끔하고 매끄러운 인상을 준다. 이같은 장점 외에도 견고성과 편리함 때문에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방식은 지금까지 인쇄의 대종을 이어왔다.
▽새 밀레니엄의 도래를 앞두고 지난 천년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미국의 언론인 부부가 쓴 ‘1천년 1천인’에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가 구텐베르크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았다는 보도다.
구텐베르크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나 종교개혁가 루터를 제치고 지난 천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인물로 뽑힌 이유는 금속활자로 책의 대량생산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보다 적어도 수세기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해 사용했던 우리로서는 많은 아쉬움을 달랠 길 없다. 우리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금속활자 인쇄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국내용’이었을 뿐이다. 19세기말 설치된 박문국(博文局)이 구텐베르크식 납활자를 일본에서 사오자 우리 활자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됐을까. 이유야 많겠지만 금속활자 주물기술자를 대장장이쯤으로 업신여긴 풍토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발명자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기술자를 ‘마이스터’로 우대하는 독일의 전통과 대조된다. 선조들의 세계적 발명품을 계승 발전시키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는 일이 천년 후에도 반복돼서는 곤란하다. 구텐베르크와 금속활자가 주는 교훈은 한번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