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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결혼·취업유예]「모라토리엄 인간형」 늘어

입력 | 1998-09-06 20:37:00


“사회로 나가는 게 무섭습니다.” IMF체제로 앞길이 막막하다는 서울대 인문대 졸업반 K씨(26)의 고민. “재수만 안 했어도 당당한 사회인으로 업무에 쫓기는 바쁜 생활속에 지금쯤 보너스가 깎인데 대해 회사 동료와 고민하고 있겠죠. 1년을 ‘꿀지만’ 않았어도….”월급을 모으며 결혼도 생각해야 할 시기.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과외 아르바이트도 잘려나가고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아쓰는 처지가 됐다. “1등, 모범생 딱지를 붙이고 지금껏 모든 것에 순응해 왔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 모라토리엄 인간형 ▼

K씨처럼 사회진출길이 막히면서 대학졸업을 앞둔 20대 중후반의 ‘준어른들’과 전후세대로 큰 고생없이 인생계단을 밟아 올라오다 벽에 부닥쳐 ‘인생유예’를 선언하는 30대가 ‘모라토리엄 인간형’에 속속 편입하고 있다. 모라토리엄은 채무에 대한 지불유예 또는 대기기간의 뜻. 한국의 ‘모라토리엄족’은 주로 타의로 사회적 ‘성장’이나 ‘진행’을 멈춘 상태.

독일에 유학하던 K씨(31·여)도 “학위를 딴다해도 자리가 없을 것같아 일단 공부를 중단했다”고 말한다.그의 학업은 유예됐다.

▼ 사랑의 접속유예 ▼

자동차회사에 근무하는J씨(28)는 95년 입사 이후 줄곧 적금을 부어왔다. 그러나 임금이 줄면서 적금을 해약해야 했고 해약금은 생계비로 다 써버렸다. 때문에 여자친구와 새끼손가락을 끼고 했던 결혼약속이행은 무기한 유예됐다.

내집마련의 꿈에 젖어 결혼 이후 6년째 줄곧 적금을 부어 전세금을 포함 1억7천만원의 목돈 동원 능력을 갖췄으나 전세금이 빠지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K씨(31·여).“마이 스위트홈을 갖기 직전에 ‘남’의 손이 이를 늦추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 한 ROTC출신의 자기최면 ▼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J씨(26). 두려움 속에서도 나름대로 ‘포스트 모라토리엄’에 대비한다. 취업을 아예 2년 뒤로 미루고 영어와 웹디자인을 파고 있다. 그는 자신감마저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수시로 자기최면을 건다. ‘나는 기업이 선호하는 공대출신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도 많다’ ‘나는 천리행군에서 졸병의 군장을 대신 져준 체력을 갖고 있다’‘고로 나는 칭찬받을만 하다’.

▼ 세리가 필요해 ▼

록그룹 락왕극단(樂王劇團)이 ‘IMF세대’의 고뇌를 노래한 ‘세리가 필요해’. ‘나도 한 때 잘나갔지…요즘은 ‘방콕’만 가지…이젠 네게 내가 필요해 내이름은 세리 요술공주.’모라토리엄족은 큰 고생을 모르고 요술공주 세리 아톰 마징가제트와 함께 자라왔다. 이제 좌절을 맛보면서 ‘요술공주 세리’같은 나름의 ‘영웅’의 출현을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은 없는 걸까.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과장. “모라토리엄족은 어쩌면 선택된 집단이다. 철저하게 매정해질 사회환경을 생각하면 이에 적응할 기간을 ‘보장’받은 셈이다. 유예기간을 잘 이용하면 IMF체제가 끝난 뒤 ‘날릴’ 것이다. 그 때는 능력만 보는 사회니까.”

성균관대 최인수교수(교육학). “사회적 성장이나 진행이 중단되면 좌절해 냉소적이 되거나 심하면 반(反)사회성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을 되돌아 보거나 유연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이들이 ‘모라토리엄 정서’를 지닌 채 장년층이 되면 사회 전반에 또다른 충격을 줄 가능성도 있다.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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