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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문민정부37]‘포철’의 기구한 운명

입력 | 1998-04-09 21:06:00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3월 7일, 조말수 (趙末守) 포항제철 부사장은 ‘서초동 엄회장’으로 불리던 엄기현(嚴基鉉)씨와 자리를 함께 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경남고 2년 후배로 운송업체를 경영하고 있던 엄씨는 김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한 이래 대소사를 챙겨온 평생동지.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 엄효현(嚴孝鉉)씨는 그의 동생이다.

당시 조부사장은 포철의 싱가포르지사장이었지만 몰래 귀국해 있었다. 엄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박태준(朴泰俊)씨는 해외로 떠나야 할거요. 국내에 있으면 감방행이지. 자네가 포철의 실세 사장으로 취임하게. 그런데 허세 회장으로는 누가 좋을까?”

“포철사장을 지낸 안병화(安秉華)한국전력 사장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안사장이 오면 자네가 힘을 못써.”

“정명식(丁明植)부회장은 어떨까요.”

김대통령 집권 초기 1년 동안 엄기현씨가 사실상 포철을 수렴청정했다는 것은 정설로 통한다.

그러나 엄씨의 주장은 다르다.

“나는 포철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김대통령이 좋은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두 사람을 추천했을 뿐이다.”

그러면 10년이 넘게 박태준포철회장의 비서로 일한 조부사장이 문민정부 출범 직후 사장으로 발탁된 배경은 무엇일까.조말수씨 측근의 설명.

“조씨는 엄기현씨의 동생과 절친한 대학동창입니다. 조씨는 92년 대선 직전 부사장 직급인데도 부장급이 맡고 있던 싱가포르지사장으로 쫓겨나 박태준회장에게 핍박받은 인물로 비쳤어요. 게다가 그는 포철 내부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적임자로 여겨진 겁니다.”

조부사장과 엄씨의 회동 사흘 뒤인 3월10일 오전9시 김포공항 국제선청사.

포철신화를 창조한 박태준명예회장은 이대공(李大公)부사장과 조용경(趙庸耿·현 자민련총재 비서실차장) 정치담당비서를 뒤로 한 채 일반인들 틈에 끼어 출국수속을 밟았다.

이틀뒤인 3월12일 경북 포항시 괴동동의 포철본사1층 국제회의장. 정기주주총회가 열린 회의장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주총 직전 새 이사진의 명단을 받아든 황경로(黃慶老)회장은 ‘임원선임의 건’에 이르자 “나는 이미 사의를 표명했다”며 사회권과 함께 명단을 정명식부회장에게 넘기고 총회장을 빠져나갔다.

정부회장이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퇴임, 명예회장 이사 박태준, 대표이사 회장 황경로….”

주총을 시작으로 7월말까지 모두 1백여명의 ‘박태준 사람들’이 포철을 떠났다. 그대신 정명식씨가 회장에, 조말수씨가 사장에 올랐다.

조용경씨의 설명.

“평소 박회장에게 신세를 많이 진 최형우(崔炯佑) 서석재(徐錫宰) 박관용(朴寬用)씨 등 민주계 실세들이 대선 직후 박회장을 구하기 위해 김대통령에게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김대통령은 ‘두번 다시 그런 말을 꺼내지 말라’며 화를 내곤 했답니다.”

최형우씨는 나중에 죽마고우인 박득표(朴得杓)사장만이라도 살려달라고 김대통령에게 애원했지만 “참 좋은 친구 뒀다”는 면박만 들었다.

박사장은 김대통령이 민자당 대통령후보가 된 이후 나름대로 열심히 김대통령을 지원했다. 그러나 박회장 구명운동을 한 것이 괘씸죄가 돼 결국 포철을 떠나야 했던 것.

조용경씨의 추가 설명.

“대선 직후 나는 장중웅(張重雄)상무한테서 ‘도피성 유학’을 제의받아 곧 외국으로 떠나기로 합의된 상태였습니다. 4월 중순쯤 갑자기 장상무가 부르더니 ‘당신, 생각보다 머리가 둔한 사람이군’이라며 면박을 주고는 ‘회사를 위해 사표를 내라’고 하더군요.”

3월 말 투병중이던 박태준씨를 문병하기 위해 몰래 두차례 일본을 다녀온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청와대에서 나의 행적이 자세히 보고된 자료를 내려보내면서 내보내라고 했다는 겁니다.”

‘박태준 사람들’은 거리로 내몰린 뒤에도 살아남기 위해 박태준씨를 외면해야 했다.

조말수사장은 취임 직후 ‘박태준 흔적지우기’에 나섰다.

포철 곳곳에 걸려있던 박씨의 사진과 기념식수 푯말이 철거됐다. 박씨의 휘호가 새겨진 철강 시제품 전시물은 창고속으로 사라졌다.

한 포철 관계자의 술회.

“93년 6월 포철을 방문한 일본 스미토모(住友)그룹의 사장은 박회장의 흔적이 사라진 것을 보고 의아해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포항공대 홍보비디오에 두차례 등장하는 박회장의 모습을 보고는 상당히 감동했습니다. 고(故) 김호길(金浩吉)포항공대 학장이 테이프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김학장은 그 일로 꽤나 시달려야 했다. 포철 담당임원은 “테이프를 재편집하지 않으면 내가 곤란해진다”며 매달렸고 김학장은 “역사 기록인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버틴 것.

결국 김학장은 한달뒤 테이프를 재편집하면서 박씨의 모습을 삭제했다.그는 항의의 표시로 자기 이름도 함께 빼버렸다.

당초 정부는 포철을 회장이 없는 사장체제로 운영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조사장이 회장제를 요구하는 바람에 방침이 바뀌었다. 조사장은 이 결정 때문에 1년 뒤 사장직을 물러나야 했다.

조전사장은 “박태준이라는 ‘거목’이 없어지고 난 뒤 그 빈자리를 혼자서 메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장제 도입을 건의했었다”고 회고했다.

정명식회장은 취임 초기에는 “나는 대외업무만 전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회장은 부회장 시절에 사용하던 사무실을 그대로 썼다. 조사장이 박태준씨가 쓰던 사무실로 들어간데서 두 사람간의 역학관계를 엿볼 수 있다.

정회장―조사장 체제 몰락의 실마리는 엄기현씨와 조사장의 불화와 제2이동통신사업권 획득에서 시작됐다.

조전사장의 회고.

“엄기현씨가 93년 하반기에 포철의 운송권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혼자 결정할 수 없어 박관용청와대비서실장을 통해 김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보고를 받은 김대통령은 엄씨를 심하게 질책했다더군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안 민주계 실세들은 ‘조사장이 있는 한 포철에서 먹을 것이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고 나를 공적(公敵)으로 여기게 된 겁니다.”

이와 관련, 박전실장은 조사장에게서 그런 보고를 받은 일이 없다고 해명했다.

정회장은 민주계 실세들이 조사장을 버렸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94년 1월4일 신년하례식을 마치고 정회장 조사장 등 임원들이 차를 마시던 자리였다.

느닷없이 정회장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조사장을 향해 폭탄발언을 했다.

“앞으로 사장은 임원들과 같은 열에 앉으세요. 또 대내업무도 내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얼굴이 벌게진 조사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어 정회장은 조사장의 측근인 장중웅상무를 뉴욕지사로 발령해버렸다. 두 사람의 불화소식을 전해들은 김대통령은 격노했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실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의 설명.

“화가 난 김대통령은 두사람 모두에게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정회장과 조사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사표를 냈습니다.”

혼비백산한 두사람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제2이동통신사업권(신세기통신)을 따내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조전사장의 설명.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어느날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시늉만 내고 절대 사업권을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화로 알려주더군요. 그 관계자는 ‘제2이통은 갈 곳이 정해져 있다’며 은근히 코오롱을 두둔하더군요. 그런데도 이를 무시했어요.”

제2이통 사업권 배정을 담당했던 한 재계인사의 설명도 이와 비슷하다.

“94년 당시 현철씨가 코오롱을 밀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어요. 어느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현철씨를 만나 물어봤습니다. 현철씨는 선거 때 도움을 좀 받았다. 될 수 있다면 코오롱이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배정되면 정권에 부담이 갈 수 있다고 말했더니 한발짝 물러나 ‘무리하게 코오롱을 밀 것까지는 없다’고 하더군요.”

정―조 체제 출범 1년 뒤인 94년 3월8일 오전7시.

포철의 주주총회장으로 향하던 승용차안에서 조사장은 지나간 1년을 되새겨봤다. 큰 과오도 없었고 이통사업권도 따냈다.그는 연임을 확신했다.갑자기 카폰이 울렸다. 송수화기를 집어 든 조사장은 몇마디 응답하다가 힘없이 수행비서를 불렀다.

“박비서, 이임사 준비해요.”

조전사장은“ 주총 전날밤 현철씨 측에서 결정을 뒤집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태준씨의 손에서 김대통령의 수중에 떨어진 ‘국민기업’ 포철은 엄씨와 정―조씨를 거쳐 김만제(金滿堤)회장체제로 이어지면서 문민정부 내내 정권의 대리인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허승호·이희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