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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합이 뭐길래?…『煞』판정엔 신세대도 『에그머니!』

입력 | 1998-03-23 20:59:00


회사원 L씨(29). 지난해 가을 3년간 교제하던 여자친구 P씨(27·대학원생)에게서 난데없는 ‘이별통고’를 받았다. 이유인즉 L씨가 ‘도끼’이기 때문. “몰래 궁합봤어. 그랬더니 난 나무고 오빤 내 사지를 마구 쳐내는 도끼래.” 황당한 L씨. 다급히 PC통신으로 들어가 ‘오행으로 본 겉궁합’에 자신과 여자친구의 생년월일시를 쳐넣었다. ‘남금여목(男金女木)이라. 남성의 금(金)이 여성의 목(木)을 극(剋)하는 형국이다….’

L씨는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다. 여자가 남자를 떠받들어 준다는 말이니 오히려 운이 틔어 집안이 안락해질 수 있다”며 P씨와 그 가족을 설득했다. 어렵사리 3월말로 결혼날짜를 잡는데 성공한 L씨. 지난 7일, 한숨 돌린 L씨의 방에 들어온 어머니가 뜬금없이 금붕어가 든 어항을 내밀며 속삭였다. “이거 결혼 후 신방에 놔두거라. 속궁합 봤더니 두사람 모두 물(水)이 부족하단다.”

궁합.

▼흉살(凶煞)이여 내게로 오라!▼

J은행 대출계 W씨(29·여). 1월 서울 신촌의 한 철학관에서 2년6개월 사귄 남자친구 L씨(31·은행원)와 궁합을 봤다. 결과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발전은 늦으나 절대 망하지 않는, 매우 평탄한 인생을 산다’. 또다른 두군데에서 궁합을 봐도 역시 같은 결과가 나오자 W씨는 가차없이 L씨와 헤어졌다. “어차피 인생은 짧다. 내가 바라는 건 회사원의 아내도 판검사의 아내도 아니다. 나중에 망하고 도망다닐지라도 한때의 ‘확실한’ 재벌이 좋다. 재벌은 망해도 3대를 간다더라.” W씨의 어머니(56)는 “그래도 오래 연애했으니 정으로 살라”며 말렸으나 소용 없었다.

인생 기복이 극심하다는 흉살. 하늘이 내린 이 형벌을 도리어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로 삼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시대다.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인 신세대의 합리적 취사선택이 오히려 궁합에 대한 맹신, 때로는 배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80년대 중반 날리던 운동권으로 유물론(唯物論)을 주장하던 S대 출신 K씨(31·여). 운동권 동지이자 같은 학과 조교이던 L씨(33)와 결혼하려다 3년전 ‘합의 결별’했다. ‘두사람 살(煞)이 상살(相殺)형이어서 결혼하면 K씨 자신이 단명할 것’이라는 궁합을 보고 난 뒤 이별을 결심한 것이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에서 역(易)상담소를 운영하는 주유진씨(37).

“젊은이들의 궁합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결코 장난이 아니다. 어떤 때는 ‘교제 궁합’과 ‘결혼 궁합’을 따로 묻기도 한다. ‘서로의 살(煞)이 부딪치는 상극(相剋)이니 좋지 않다’고 일러줘도 ‘연애할 땐 오히려 아기자기하고 튀는 게 좋은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어차피 결혼할 것도 아닌데’라는 말과 함께.”

▼속궁합도 보여요!▼

백화점에서 여성 액세서리코너를 운영하고 있는 N씨(31·여).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한 ‘처녀보살’에게 3개월전 선을 본 재미사업가 K씨(31)와의 궁합을 물었다. ‘곧 남자 사업이 망한다. 재운(財運)이 짧다. 성격도 너무 비슷해 다툼이 잦다. 그러나 변강쇠 살(煞)을 타고나 양기(陽氣)가 충만하다’는 풀이. N씨는 주저없이 결혼을 결심했다. “나도 먹고 살 걱정은 없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하지만 ‘잠자리’에 약한 남편은 날 평생 ‘바람난 여자’로 만들 게 아닌가.”

결혼미팅전문회사 선우이벤트에서 최근 이혼 또는 사별한 남녀 3백3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속궁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결론은 ‘그렇다’ 34.4%, ‘아니다’ 16.1%, ‘모르겠다’ 30.1%.

속궁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러나 요즘 세대는 철학관에서 무릎꿇고 듣는 ‘속궁합 판결’에만 속절없이 머리 조아리진 않는다. 자신의 속궁합을 스스로 진단하고 때론 ‘개조’까지 하니까.

성의학전문의 이윤수박사. “결혼을 앞둔 여성들이 종종 찾아와 ‘예비신랑이 뭔가 문제있는 것같다. 약혼도 했는데 내몸에 손끝하나 대지 않는다’며 발기부전을 걱정한다. 결혼전 남녀가 함께 병원을 찾아 조루나 발기상태를 점검하는 경우도 더이상 예외적이지 않다. 세상은 변했다.”

과거 ‘속궁합이 안맞아서’라며 체념하던 여성 불감증이나 남성의 대상성 발기부전(아내에 대해서만 발기가 일어나지 않는 현상)도 이젠 더이상 ‘운명의 장난’이 아니다. 적극적인 비뇨기과 상담이나 이미지 트레이닝, 자위와 수술을 통한 눈물겨운 극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역리학회장 지창룡씨. “속궁합이라?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고리지. 결국 업보의 문제인 걸. 과부될 팔자가 다른 놈 만난다고 과부 면하겠느냐. 다만 궁합보다는 마음이 문제. 마음 하나만 잡으면 환장할 재앙도 다스릴 수 있는 법이다.”

〈이승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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