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가 휘청거린다.
지난달 서적도매상인 송인서림에 이어 보문당이 쓰러짐으로써 도서 유통망 전체가 마비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국내 출판 유통시장의 60%를 점해온 보문당의 부도는 이와 거래해 온 2천여 출판사와 2천7백여 서점에 연쇄 도산 등 심각한 파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이에따라 출협은 부도가 났거나 또는 부도 위험이 있는 도매상의 통합 인수가 시급하다고 보고 최근 정부에 5백억원의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더 이상 정부가 지식산업의 ‘멸실(滅失)’을 방관해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출판계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비판의 소리도 만만찮다. 출판인 스스로가 자초한 오늘의 위기에 대해 과연 얼마만한 각성과 반성이 있었느냐는 질책이다. 위기의 본질을 외면한 채 ‘자금 수혈’만으로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들린다.
정말 출판계는 공황에 직면해 있는가. 정부의 지원만이 유일한 선택인가. 오늘날 출판 위기의 핵심과 본질은 무엇인가. 최근 움직임을 중심으로 몇가지 현안을 짚어본다.》
지난달 한차례 ‘오보(誤報) 파동’을 몰고 온 정부의 2백억원 지원설. 일부 출판인들이 근거없는 정부지원설을 언론에 흘려 이를 기정사실화 하려 했던 해프닝이다.
작금의 출판위기에 대응하는 출판인들의 즉흥적이고 안이한 자세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최근 출협에서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현재까지 도매상 부도로 인한 출판사 등의 피해액은 모두 6백여억원. 그 태반의 손실을 보전해 달라는 출판계 요구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IMF 구조조정으로 나라 전체가 생살이 뜯겨 나가는 아픔을 겪고 있는 이때 형평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여기저기서 멀쩡한 기업들이 쓰러지고 정리해고의 회오리 속에서 수십만명이 길거리로 내쫓기고 있는 시점에서 출판만은 성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IMF 정서’에 배치되는 것은 아닐지.
현실적으로 따져봐도 지금까지 부도가 난 단행본 출판사는 H출판사 한 곳 뿐이다.
출판계에서는 지식산업인 출판분야에 대한 특별 배려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는 출판인들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동안 양산된 책들 가운데 과연 몇% 정도를 양서로 분류할 수 있을까. 온갖 신변잡기 처세서에 외려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활자 공해’가 판치지는 않았는지.
여기에 출판사들은 고급 양장지에, 컬러에, 띠까지 두르는 요란한 포장으로 거품을 형성해 왔다. 일본과 구미 등지에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값싼 문고판은 국내에서 씨가 마른지 오래다.
어떻게든 많이 팔면 된다는 출판인들의 자세가 문제다. 책의 내용보다는 ‘영업’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그래서 ‘출판 삼륜(三輪)’이란 말이 생겨났다. ‘뿌리고 띄운 뒤 올려라’라는 유행어도 있다.
도매상과 대형서점 그리고 언론만 잡으면 얼마든지 베스트셀러를 만들 수 있다는 한탕주의. 도매상을 통해 전국에 책을 ‘뿌리고’, 언론에 광고를 통해 책을 ‘띄운’뒤, 대형서점에서 ‘사재기’로 베스트셀러 순위에 책을 ‘올린다’는 위험천만한 발상.
이 과정에서 ‘죽은’ 책들 때문에 엄청난 양의 반품이 생기고 이들 책을 파쇄하는 데 따른 비용만도 연간 수백억원대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부의 자금 지원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가다. 도매상에 의존하는 전근대적인 유통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어음 결제’라는 거래관행이 지속되는 한, 정부의 지원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선 자금 지원이 이루어지더라도 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조차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신간 발행 종수는 현저히 줄었으나 양서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의식 있는 출판사에서는 서적지 등 재생지를 활용해 책 값에서 거품을 빼고 있다.
그리고 종이 구입과 인쇄 제본 과정에서 현찰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출판사와 도매상 거래가 현금결제로 바뀌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나아가 소규모 서점상들의 반대에 부닥쳐 좌초됐던 지방 대형서점 건립 건도 점차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다. 대형 서점이 일부 유통의 몫을 떠맡아야 출판사가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책을 기획 제작할 수 있다.
물론 ‘3월 대란설’이 ‘4월 대란설’로 이월되고 있는 출판계의 위기상황은 정부로서도 방관할 수 없는 상태다. 더욱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좋은 책을 펴내온 적지않은 출판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
다가오는 문화의 세기에 책 읽는 국민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신정부에 기대해 보면서 출판인에게 한마디 고언을 하고 싶다. 출판계의 구조조정은 스스로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고통과 희생 없이는 결국 구두선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