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축년의 정치권은 처음과 끝이 극명하게 대비된 한 해였다. 그만큼 숨가빴던 해였다. 연초만 해도 자신과 확신에 차 있던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무기력하고 회한에 찬 모습으로 세밑을 맞고 40년 동안 야인(野人)이었던 김대중(金大中)후보는 청와대 입성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인과(因果)의 사슬 속에서 진행돼 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정치현장을 발로 누빈 일선기자들의 방담을 통해 올 한해의 정치권을 조망해봤다.》 [참석자] 황유성 윤정국 임채청 이동관 최영묵 최영훈 한기흥 김창혁 박제균 문철 송인수 이원재 윤영찬 김재호 김정훈 이철희기자 ▼ 「시련」예고 노동법사태 ―올해는 선거를 통한 50년만의 첫 정권교체를 이룬 해로 기록됐습니다. 또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단일후보인 김대중(金大中)후보가 대통령에 당선함으로써 이질적인 정당이 연대를 통해 처음으로 정권을 잡은 해로도 기억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다 IMF관리체제라는 경제위기까지 겹쳐 김대중정권의 출범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정치적 역량뿐만 아니라 경제해결능력까지 시험대에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김후보의 경륜과 식견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권여당의 실정이나 다른 후보의 흠결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12월26일 새벽 신한국당의 노동관계법 기습처리로 촉발된 연초 노동법사태는 정부여당에 시련의 한 해를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한 외신은 노동법개정으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인기가 급락하고 신한국당의 정권재창출 기회도 줄어들었다고 보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법개정직후만 해도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것 같습니다. 당시 김대통령은 날치기 통과에 신한국당소속 의원이 모두 참가하는 것을 보고 크게 고무됐다는 겁니다. ―연두회견에서 김대통령은 날치기에 대해 시종 자신만만한 태도였습니다. 임기말인데도 금융개혁까지 단행하겠다고 공언하고 대선후보에 대한 입장까지 밝히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후 파업정국 속에서 여야관계가 급속히 냉각됐으나 이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도 역시 김대통령입니다. 김대통령은 부랴부랴 여야영수회담을 수용하고 복수노조를 유예한 것은 잘못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통치권의 누수현상이 급속히 진행됐습니다.▼ 기아사태-IMF 쇼크 ―한보 삼미 진로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지만 7월15일에 터진 기아그룹의 부도유예사태가 IMF의 구제금융까지 받아야 하는 국가부도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본 정치권 인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정치권이 처음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기아사태에 대응했다면 오늘날의 부끄러운 상황은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도 기아자동차사태가 한보부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중차대한 사안이며 한국경제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인식은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7월 소집된 임시국회에서 여야의원들은 너나 할 것없이 기아사태에 대한 정부의 직접 개입과 조기해결을 촉구했습니다. 기아사태에 내재한 「금융대란가능성」을 직시한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신한국당 경선이 끝나고 8월부터 대선정국이 시작되면서 기아사태는 정치논리에 휘말렸습니다. 당시 이회창후보가 기아자동차공장을 방문해 기아그룹 회생의지를 천명한 것이 대표적 예입니다. ―그러나 국가부도위기를 초래한 최대의 원인은 역시 현 정부의 국정통제력 상실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치권은 시장원리만 강조한 강경식(姜慶植)경제팀을 경질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이를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IMF사태는 인재(人災)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치명적인 환부(患部)를 3개월이 넘도록 방치하는 바람에 나라 경제가 속으로 골병이 들고 있는데도 당시 경제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강부총리는 11월 정기국회에서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만 동분서주했습니다. 눈앞에 닥친 외환위기의 수습은 뒷전으로 미루고 재경원 간부들을 국회로 내몰아 법안 처리에만 행정력을 쏟아부었죠. ―하지만 대선에 매달린 정치권도 금융개혁법안 처리를 정략적으로만 이용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법안처리가 무산된 이후 외환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었죠.새해를 이틀 남겨 놓고 IMF의 요구로 재소집된 임시국회에서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으로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킨 사실은 우리 국회의 역사적 오점으로 남을 것입니다. ▼ 한보태풍-김현철 파문 ―연초의 노동관계법사태로 시작된 김영삼정권의 레임 덕 현상은 한보사태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졌습니다. 정치권과 행정부, 금융권과 기업계가 연루된 한보비리는 그야말로 문민정권의 총체적 비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한보사태는 결국 김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 문제로 비화해 현직대통령의 아들이 청문회에 서고 마침내 구속되는,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현철씨는 문민 4년의 성역이었습니다. 정계 재계 언론계 등에서도 현철씨의 잘못된 행태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현철씨 문제는 대통령 가족 및 친인척의 처신 문제와 관련,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또한 언론계로서도 뼈아픈 자성의 계기가 됐습니다. ―한보사태는 당시의 여야 실세들의 구속으로 이어졌고 이들은 최근 대법원 확정판결을 통해 국회의원직을 상실했습니다. 다만 정치권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권노갑(權魯甲) 홍인길(洪仁吉)전의원에 대한 동정론이 있습니다. 둘다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얘기지요. ―되돌아보면 한보사태를 너무나 정치논리로 접근하는 바람에 국력소모가 심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보사태가 일어나게 된 경제사회적 원인을 조속히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대신 사정(司正)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얘깁니다. 청문회다 뭐다 해서 온나라가 시끄러워 지는 바람에 대외신용도가 추락, 결국 오늘의 IMF국난을 몰고왔다는 지적입니다. ―한보사태로 득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한나라당 이회창명예총재지요. 궁지에 몰린 김대통령이 당시 신한국당 고문이었던 이명예총재를 당 대표에 임명하는 바람에 결국 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됐고 아깝게 지기는 했지만 1천만표에 가까운 표를 얻는 정치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명예총재가 당대표에 임명된 것은 김대통령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이회창진영의 쟁취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당시 이한동(李漢東)대표설이 나오던 중 이명예총재측에서 청와대측에 「대표직을 주지 않으면 탈당도 불사한다」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 여당 첫 경선과 후유증 ―7월21일 신한국당 경선 아이디어는 청와대에서 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회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이회창(李會昌)당시대표도 노동관계법파동 등으로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신한국당이 연말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히든카드로 「당내 경선」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경선당시 쟁점 중의 하나는 이회창대표의 대표직 사퇴였습니다. 다른 경선후보들이 일제히 이회창대표의 대표직사퇴를 촉구하며 이른바 「반이(反李)연합전선」을 만들었지요. 처음 태동한 것이 박찬종(朴燦鍾) 김덕룡(金德龍) 이인제(李仁濟)후보의 3인연대였습니다. 이들은 젊음을 무기로 세대교체를 외쳐 「한글세대연합」으로 불렸지요. ―경선에서는 대세몰이가 위세를 떨쳤습니다. 이회창대표는 정치신인답지 않게 다른 후보들의 공세를 적절히 물리치면서 대세몰이에 성공해 집권당후보 자리를 차지했지요. 그러나 지나친 대세몰이가 경선후유증을 낳았고 결국 대선에서 「여당불패」라는 신화가 깨어지는 씨앗이 됐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입니다. ―경선과정에서 이수성(李壽成)고문은 한때 「김심(金心·김영삼대통령의 의중)시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발협이 양분되는 과정을 보면 YS는 경선과정에서 중립을 지켰던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YS가 이수성고문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졌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론조사결과 이고문의 지지율이 예상보다 낮게 나온데다 특정 후보를 지지할 경우 당이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밀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경선 전날 이한동 박찬종 김덕룡 이인제후보가 4자연대를 이뤄 막판뒤집기가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낳았습니다. 1차경선에서 이한동고문을 간발의 차로 누르고 2위를 차지한 이인제경기지사가 결선투표에서 명연설을 하면서 장내 열기를 뜨겁게 달궜지만 결국 역부족이었습니다. ―경선후유증은 이회창후보의 정치력 부재에다 「7인방」이니 「9인회의」니 하는 신실세그룹의 독주로 낙선후보를 챙기지 않는 바람에 악화했습니다. 이회창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문제로 곤경에 빠졌지만 경선후유증을 제대로 치유하고 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면 대선에서 이길수도 있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 50년만의 첫 정권교체 ―이번 대선하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TV토론과 여론조사 아닙니까. 오죽하면 미국에서 몇십년동안 한 것보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한 TV토론이 더 많을 것이라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TV토론은 우리의 선거형태를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여론조사도 각 언론사들이 정말 많이 했습니다. 세 후보가 막판까지 3파전, 혹은 2강1중구도로 접전을 벌이는 바람에 여론조사에 대한 관심도도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론조사결과를 놓고 시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먼저 이회창후보측은 이후보의 지지율이 바닥세를 보일 때 김현철(金賢哲)씨 인맥이 이인제후보를 도우려고 여론조사결과를 조작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YS신당설로 이인제후보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이회창후보의 지지율이 반등세로 돌아서자 조작설은 꼬리를 감췄습니다. ―대선와중에 일어났던 「키재기 소동」은 정말 낯뜨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밖에 근거없는 폭로전과 흑색선전이 꼬리를 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이 대선사상 가장 깨끗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지역감정 조장과 언론의 편파보도가 쟁점으로 떠올랐지요. 지역감정은 한나라당이 먼저 불을 지폈습니다. 중앙일보는 11월초 「YS신당지원설」 「1백억원 지원설」 등을 보도해 이인제후보측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후 국민신당측은 중앙일보의 「이회창후보지원 문건」으로 역공을 펴기도 했습니다. 또 대선막바지에 중앙일보와 조선일보가 1면머릿기사로 「대선판도가 양자구도로 짜였다」고 보도하자 또다시 거세게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50년만의 정권교체는 일어나기 힘든 10여 가지 요인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입니다. 「DJ 천운론」은 거기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한때 이회창후보진영에서는 경선이후 바닥세로 떨어졌던 지지율이 다시 30%대로 올라가자 「이회창 천운론」을 주장하기도 했지요. ―뭐니뭐니 해도 IMF한파가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너무 큰 변수가 돼서 지역감정이나 북풍이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회창후보는 경제파탄 책임론으로 상당히 손해를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