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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만에 실종됐다던 오빠가 돌아왔다 한 줌 유해로 (일)

57년만에 실종됐다던 오빠가 돌아왔다 한 줌 유해로 (일)

Posted February. 09, 201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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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긋지긋한 학교를 떠나 군인이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얼마 후 코리아라는 낯선 전쟁터로 떠나갔다. 참전 5개월 만에 전쟁 중 실종을 알리는 전보가 그의 가족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가슴앓이는 시작됐다.

2007년 10월 미국 워싱턴 외곽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널드 트렌트 미 육군 상병이 묻혔다. 가족들은 실종 57년 만에 한 줌의 뼛조각으로 돌아온 그를 보면서 상처로 얼룩진 가족사의 한 장()을 이제는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트렌트의 부모님은 이미 1970, 80년대에 숨을 거뒀다.

해리엇 듀란 씨(71)는 도널드의 막내 여동생이다. 9세 소녀 시절 큰오빠의 입대와 실종 소식을 접한 이래 수십 년 동안 사라진 오빠의 기억을 안고 살아 온 그를 5일 네바다 주의 소도시 스파크스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국방부로부터 오빠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2007년 5월을 떠올렸다. 그전까지 정부가 설명했던 것과 달리 오빠는 전쟁포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증언에 따르면 트렌트는 1950년 11월 말 평안도 구장군의 청천강변에서 중공군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듀란 씨는 그 소식을 듣고 납덩어리를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으니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고통이 길었을) 포로수용소 생활보다는 빨리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도 했다. 듀란 씨는 1990년대 말부터 전쟁 중 실종된 미군 가족들과 교유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며 지내왔다.

트렌트 상병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참전 1개월 만에 부상을 입어 본국 송환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는 1개월간 일본에서 병원 신세를 진 뒤 동료와 함께 싸우겠다며 다시 한국행을 희망했다.

그의 유골은 청천강변 농가 주변에서 발굴됐다. 북-미 간에 반짝 화해 기류가 흐르던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인 2000년의 일이었다. 그는 총에 맞아 죽은 뒤 이 농가 주변에 매장됐고, 젊은 시절 이를 목격했던 한 북한 농부의 신고에 따라 미군은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발굴 결과 뼛조각 20여 개와 치열 흔적이 나왔고,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듀란 씨는 어릴 적 (키가) 큰 오빠로만 기억했던 오빠의 신장이 167cm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트렌트 가족의 지난 50여 년은 망가진 삶(devastation)이었다고 듀란 씨는 회고했다. 아들의 공백에 부모는 괴로워했다. 집으로 부친 편지에서 어머니의 걱정을 염려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빼먹지 않던 아들이었다.

특히 군인이 되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다른 오빠가 타고 가던 헬리콥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받은 부모님의 충격은 컸다. 다행히 이 오빠는 죽지 않고 생존했다. 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에도 절대 오빠 찾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듀란 씨는 북한과 중국을 원망하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오빠는 군인이 되고 싶어 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쟁에 참여한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빠는 1940년대 말 고향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군 입대를 위해 가출했다. 사라진 오빠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만, 그날 밤 오빠는 켄터키 주의 훈련소에서 전화로 아버지, 오늘 군에 입대했어요라고 소식을 알려와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듀란 씨는 유일한 여동생인 나를 오빠는 각별히 예뻐했다며 (비록 전화 통화였지만) 그때처럼 오빠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오빠는 만 18세가 돼야 하는 군 입대 조건을 맞추기 위해 나이를 거짓으로 한 살 올려 신고했다고 한다.

생후 13개월 때 죽은 큰언니가 있었지. 난 만나 본 적도 없지만. 부모님은 각각 숨을 거두면서 하늘에서 첫딸과 큰아들이 자신들을 기다릴 것으로 확신했을 거라고 믿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재회의 기쁨을 누렸을 거야.

듀란 씨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삶의 새로운 장을 살아가고 있었다.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