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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기억 속의 우리 엄마들

Posted March. 11, 2023 08:09,   

Updated March. 11, 2023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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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의 반 이상이 죽어 나가던 전쟁 시절, 소설 속 나의 할아버지는 용케 살아남았다. 할아버지를 찾겠다고 죽창과 총을 든 무리가 집에 찾아오면 어김없이 할머니 기길현이 나섰다. 자식을 굶기는 한이 있어도 떡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돌리며 살뜰히 챙겼던 할머니. 그녀의 인심 덕분에 할아버지는 화를 면했다. 표제작인 ‘반에 반의 반’에서 큰아버지가 나에게 들려준 자신의 엄마에 대한 일화다.

2000년 등단 후 독창적인 여성 미학을 보여 준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엄마도 아시다시피’(문학과지성사·2013년) 이후 10년 만에 여성을 소재로 한 9개 단편을 묶어 펴냈다.

누구나 엄마에 대한 특별한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간다. ‘반에 반의 반’은 독자들이 간직하고 있을 엄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작품에서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나는 정육 기계점을 운영하는 큰아버지를 찾아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다른 가족들은 어느 여름날 계곡에서 알몸이 드러나도록 옷을 훌훌 벗어던진 채 어린아이처럼 물장구치던 할머니를 기억한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머릿속엔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돌리며 인심을 베풀고, 결국 그 덕에 환란 속에서도 집안과 자식을 지킨 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다. “어머니는 믿고 있었던 거지. 그 떡이 언젠가 큰 힘이 되리라는 걸.” 큰아버지의 기억 속 엄마는 역사적인 위기 상황에 지혜로운 처세로 집안을 살린 어른이었다.

‘아버지가 되어주오’는 남편을 ‘그의 아버지가 될 정도로’ 사랑한 여성을 소재로 했다. 소설은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해 위장 이혼하는 노부부의 이야기다. 작품 속 나는 스물두 살에 자신을 낳고 평생 권위적인 아버지와 사느라 희생한 엄마에게 ‘진짜 이혼’을 권한다. 하지만 엄마는 “넌 네 엄마 인생이, 그렇게 정리되면, 좋겠니?”라며 지독한 가난과 폭력적인 부모 아래서 성장한 남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을 듬뿍 받고 유복하게 자란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세상을 품고,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를 키웠다.


최훈진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