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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올드보이 원룸촌 멤돈다

Posted October. 19, 2012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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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부푼 꿈을 안고 강원 원주에서 올라와 서울 H대에 입학한 정모 씨(34).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대학에서 5분 거리의 하숙집이었다. 월 18만 원짜리이다 보니 방은 비좁고 화장실도 공용이었지만 소담한 꿈을 키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10년 뒤면 강남은 아니더라도 시내에 자그마한 전셋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도란도란 살 수 있겠지.

15년이 흐른 2012년 정 씨는 30대 중반이 됐지만 여전히 대학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교이던 H대가 아닌 K대 근처라는 점만 달라졌다. 10여 년간 모교 근처에서 살다가 3년 전 직장을 오가기 편한 이곳으로 옮겼다. 지금 사는 원룸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 50만 원이다.

정 씨가 대학가를 맴도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작은 홍보회사에서 일하며 연봉 2500만 원을 받는 처지에 월세 70만80만 원을 웃도는 도심 오피스텔은 사치일 수밖에 없다. 전세로 갈아타자니 목돈도 없다. 한 달에 200만 원 남짓한 월급에서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생활비를 쓰고 부모님께 용돈까지 드리고 나면 적금을 부을 돈은 남지 않는다.

정 씨는 결혼 안 한 친구들을 보면 저뿐만 아니라 이렇게 대학가에 많이 산다며 부모님의 도움 없이 대학가를 벗어날 수 있는 졸업생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넘쳐나는 대학가 올드보이족

정 씨처럼 졸업 후에도 대학가를 맴도는 취업준비생이나 직장인이 늘고 있다. 치솟는 물가와 높은 방세를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 주거비가 싸고 생활비 부담도 적은 대학가 원룸촌을 전전하는 것.

서울 성북구 안암로 고려대 근처에서 원룸을 운영하는 김명자 씨(50여)는 재학생 못지않게 직장인도 많이 거주한다며 한 졸업생은 강남에 직장을 구했지만 임차료가 싸니 계속 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 도심 오피스텔 월세는 급여가 넉넉지 않은 사회 초년생에게는 버거운 수준이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에 따르면 사무실이 밀집한 강남구 역삼동 두산위브 센티움(전용면적 27m)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 83만 원을 받는다. 역삼동 에클라트(전용 27m) 역시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가 75만 원이다. 이보다 비싼 오피스텔도 수두룩하다. 전세의 문턱도 높다. 수도권의 1억 원 이하 전세 아파트는 최근 2년 새 90만596채에서 53만3792채로 41%나 줄었다.

반면에 대학가 주변에서는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40만50만 원이면 방을 구할 수 있다. 반지하로 눈높이를 낮추면 월세 35만 원짜리 방도 있다. 직장을 못 잡은 졸업생들은 취업 준비를 위해서라도 학교 근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2010년 2월 고려대를 졸업한 김모 씨(31)도 3년째 대학 근처 원룸에 살며 학교 도서관을 오간다. 2년간 행정고시를 준비했지만 번번이 1차에서 미끄러졌고 뒤늦게 취업전선에 나선 그가 학교 근처를 떠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후배들에게 민폐?

졸업해 떠나가야 할 많은 선배가 대학가 주택시장에 잔류해 버리니 신입생이나 재학생들의 방 구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상당수 재학생들이 입학시즌이 다가오면 또 한 차례 방 구하기 전쟁이 치러질 것이라고 걱정할 정도다.

현택수 고려대 교수(사회학과)는 해외에서도 이런 현상이 많다면서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취업준비생이나 새내기 직장인들이 도심이나 양호한 주거지역에 진입하지 못하는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학생들 중에는 생활공간을 놓고 후배들과 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미래의 슬픈 자화상을 발견한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연세대 경제학과 4학년 신모 씨는 비좁은 원룸에 살면서도 취직을 하면 사정이 나아질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선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직장을 구해도 상황은 크게 안 달라질 것 같아 암울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청년실업 장기화로 대학가 올드보이 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본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취업준비생, 사회 초년생들이 대학가 원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20, 30대의 주거의 질, 삶의 질이 그만큼 악화된다는 말이라며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했다.



장윤정 유성열 yunjung@donga.com r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