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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어깨 누르는아, 삶의 무게여!

Posted November. 26, 200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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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만났다. 매끄러운 문장과 노련한 서술방식으로 삶의 복잡다단한 결을 포착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청해씨(56)의 4번째 소설집 악보 넘기는 남자는 우선 재미있다. 그리고 책을 다 덮으면 묵직한 울림이 전해져 온다. 문득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며 걷고 싶다. 그러면서 이렇게 나 자신에게 묻고 싶다. 산다는 게 과연 뭘까.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년이다. 40대 중반의 중학교 교사이거나 쉰다섯의 중산층 주부, 50대의 공무원이다. 이들은 밥을 굶었거나 헐벗은 적이 없다. 큰 부자로 산 적은 없지만 별 불만도 없다. 큰 욕심이 없고 원하는 것을 멀리서 찾지도 않는다. 영화롭지는 않지만 자족한다는 의미에서 누구보다도 복되다고 생각하며 살아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들은 갑자기 옛 애인의 전화를 받거나(오후의 빛), 25년 만에 여고 동창모임에서 옛 친구를 만나거나(생의 한가운데), 경제불황으로 직장을 잃어버리면서(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 문득 거울 속 자기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묻는다. 정말 괜찮았어? 이게 네가 만족할 만한 모습이야?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이런 물음들 앞에 쉽게 허무에 빠지거나 흔한 일탈로 흐르지 않는다. 그들은 앞만 보고 달려오다 중년에 문득 닥친 삶의 무거움에 무너지지 않는다. 가졌든, 가지지 못했든, 성공한 삶이든, 그렇지 않은 삶이든, 결국 삶은 본질적인 면에서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통찰하는 이청해 소설의 빛나는 매력인 셈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곧잘 대비된다.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는 직장과 아내를 잃은 사내와 그로부터 빚을 받아내기 위해 찾아온 신용보증기금 직원의 이야기다. 한 남자는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지만 몸이 건강한 대신, 다른 남자는 직장은 있지만 암 투병 중이다. 빚을 갚아야 하거나 받아야 하는 상반된 입장에서 만난 두 남자는 서로의 사정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결국 인생에서 각자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합은 똑같다는 아이러니를 체득하게 된다.

이런 대비적 동질성은 생의 한가운데에서도 드러난다. 사별한 후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는 나와 대학교수 아내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여고 동창생 윤주의 삶은 겉으로는 행불행이 쉽게 판단된다. 그러나 나는 윤주 역시 연이은 교통사고로 다리를 여러 번 수술한 데다 남편의 외도로 심신이 피로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윤주의 삶이 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이청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삶을 보는 연민과 포용의 시선이다. 그녀의 소설 속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훌륭하지 않은 일이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표제작 악보 넘기는 남자의 주인공은 그것(악보 넘기는 일)도 직업이냐는 말에 이렇게 답한다. 이렇게 좋은 음악을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이 뿌듯해.

이미 전작 오로라의 환상을 통해 순애보 사랑을 설파한 작가는 역시 아날로그 세대다. 돈만이 모든 가치의 중심인 이 시대에 디지털 세대는 아날로그 세대를 조롱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은 그들에게도 여지없이 흘러갈 것이고 그들 역시 늙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그때 가서야 알게 될까, 인생의 행불행의 합은 결국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것을.



허문명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