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일(현지 시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등 유엔 산하 기구 31개, 비(非)유엔 국제기구 35개 등 총 66개 국제기구에서 탈퇴한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백악관은 관련 설명 자료에서 “대통령은 이 기구들에서 탈퇴해 납세자 돈을 절약하고 이를 ‘미국 우선주의’ 과제에 집중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기구 탈퇴로 절감한 예산을 △국방 △인프라 건설 △불법 이민자 유입 차단 등에 쓰겠다는 의미다.
이번 결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주도했던 다자주의 체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의도로도 해석된다. 지난해 1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 통상과 안보 영역에 이어 국제 협력 부문에서도 기존 틀을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힘을 통한 압박’과 ‘개별 거래를 통한 이익 확보’를 강조하고, 트럼프식 팽창주의 기조가 반영된 결정이란 분석이 나온다.
● 기후변화, 이민 등 트럼프가 저격해 온 분야 국제기구 대거 탈퇴
백악관은 이날 “대통령은 미국의 독립성을 약화하고 비효율적이며 미국에 적대적인 의제에 납세자의 돈을 낭비하는 국제기구에 대한 참여를 종료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당 기구 중 상당수가 기후 대응 정책, 진보 이념에 관한 각종 사업을 추진해 왔는데 이는 “미국의 주권 및 경제적 역량과 충돌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연방정부의 모든 부처 및 기관은 해당 기구들에 대한 참여 및 자금 지원을 중단한다고 예고했다.
백악관이 공개한 탈퇴 결정 국제기구들은 △기후변화 △노동 △이민 △저개발국 지원 등 트럼프 대통령이 꾸준히 불만을 나타냈던 의제와 관련이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 등을 비난할 때 단골 소재로 꺼낸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이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 등과 관련된 기구도 여럿이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는 개발도상국의 기후변화 대응을 지원하는 ‘유엔기후변화협약’. AP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기후변화 대응을 중시하는 국제기구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최신 조치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때도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이 다시 가입했지만 그는 재집권하자마자 재탈퇴를 결정했다. 지난해 11월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 제30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에도 불참했다.
성과 출산 관련 보건 정책을 담당하는 ‘유엔인구기금(UNFPA)’에 대한 지원도 중단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집권 공화당의 일부 인사들은 이 기구가 중국 등에서 이뤄진 강제 낙태에 관련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때부터 꾸준히 국제기구 탈퇴 움직임을 보여 왔다. 지난해 1월 재집권한 뒤에도 유엔에 대한 자금 지원을 대폭 줄였고, 유엔인권이사회(UNHRC)에 대한 관여 또한 중단했다. 유엔의 교육과학문화기구인 유네스코(UNESCO), 세계보건기구(WHO),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 등에서도 탈퇴했다.
● 국제기구 추가 탈퇴도 진행 중
백악관은 이번 조치가 “모든 국제 정부 간 기구·협약·조약에 대한 전면 재검토의 일부”라며 국제기구에서의 추가 탈퇴 가능성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의 추가 검토에 따른 나의 평가가 진행 중”이라고 밝혀 추가 탈퇴 작업이 상당 부분 이뤄졌음을 내비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으로 대표되는 다자주의를 지향하는 국제기구를 향해 줄곧 무용론을 제기하며 불신했다. 그는 유엔 창설 80주년을 맞은 지난해 9월 제80차 유엔 총회 연설에서 “유엔은 무능하고 공허한 말뿐인 기구”라고 비난했다. 로이터통신은 그가 국제기구의 효용성, 책임성, 자금 조달 등 운영 방식에 꾸준히 의문을 제기해 왔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조치가 상징성이 큰 곳을 골라 ‘선별적 이탈’을 했던 과거의 조치와 차이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수의 국제기구를 동시에 겨냥해 ‘패키지’로 발을 뺀 건 이례적이라는 것.
이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한 데 이어 덴마크령 그린란드, 쿠바, 콜롬비아, 멕시코 등 서반구 여러 나라를 동시에 정조준하며 영향력 확대 의지를 보여온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와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규범을 중시하는 다자주의 축을 크게 흔들면서, 대신 힘을 통한 거래로 질서를 재편하겠단 구상을 강조한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다만 국제기구에 대한 대규모 탈퇴로 개도국 관련 보건, 구호 사업 등에 공백이 생기면 국제사회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결과적으로는 미국 부담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신진우 niceshin@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