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 태산과 곡부
중국 산둥성에 있는 취푸(曲阜)는 공자(B.C. 551~479)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3공(三孔)’이 있다. 공자의 사당 공묘(孔廟), 공자 후손이 대대로 살아 온 저택이자 집무실 공부(孔府), 공자 가문 무덤이 있는 공림(孔林)이다.
● 노벽을 찾아서
중국 산동성 제녕대 본관 앞 공자와 제자상.
인구 10만 소도시 취푸는 춘추시대에는 노나라 수도이자 2000년 넘게 유교의 총본산으로 여겨져 왔다. 지금은 삼공을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도시가 먹고 산다. 곳곳에 공자님 말씀이 가득하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온고지신(溫故知新)’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같은 논어 구절이 가판대에도, 벽에도 써 있고, 가로등에도 달려 있다. 밤이 되면 수양버들 가지에 늘어뜨린 문구에 조명이 들어와 밝게 빛나니 진정 ‘공자의 도시’가 맞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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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 명고성 앞 수양버들에 늘어뜨려진 공자 어록.
취푸 제녕대에서 열린 한중문화교류 특별 전시회 ‘유풍묵운’.
이 전시회를 주선한 공자 후손 공상위 선생과 곡부시사회 부회장 국위 선생의 초대로 저녁식사를 하는데 식탁 위에 놓인 ‘노벽(魯壁)’이라고 새겨진 작은 담벼락 모양 장식물이 눈에 띄었다. 노벽은 이튿날 공묘에서 그 실체를 볼 수 있었다.
공묘
공림의 공자 사당으로 가는 길.
공묘(孔廟)는 공자의 무덤이 아니라,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7개 문을 통과한 후 대성전에 도착하는데, 제일 처음 만나는 석문에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맹자(孟子)의 ‘만장(萬章)’ 편에 나오는 말로, 음악을 연주할 때 쇠로 만든 종소리(金聲)로 시작하고, 마지막엔 옥으로 만든 경석의 울림(玉振)으로 끝내는 것처럼, 공자는 ‘처음이자 끝’인 성인이라는 뜻이다.
금성옥진
조금 더 걷다보면 제3문인 홍도문(弘道門)에 다다른다. 논어(論語) 위령공편에 있는 ‘인능홍도 비도홍인(人能弘道 非道弘人)’구절에서 인용한 단어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 도(道)는 수동적이고, 사람(人)이 능동적인 주체다. 도 자체는 추상적이고 불완전하며, 사람의 실천, 행동, 의지가 도를 실제로 살아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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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문
도덕과 이상, 이념은 종이 위의 글귀일 뿐이다. 만일 도가 사람을 넓혀준다면? 그것은 결정론이다. 공자는 “좋은 이념(사상)이 자동으로 좋는 세상을 만든다”는 환상을 명확히 거부한다. 남북과 좌우가 이념으로 갈라져 싸우는 시대. 홍도문에서 공자의 말씀을 되새겨본다.
살구나무 우거진 행단.
그런데 우리 조선 시대에는 행(杏)자를 살구나무가 아닌 은행나무로 해석했다. 성균관을 비롯해 전국 서원과 향교에 은행나무가 있는 이유다. 조선시대에도 행단에 심어진 나무가 살구나무냐, 은행나무였느냐는 논쟁이 있었다. 취푸 공자의 사당에 있는 행단에 살구나무에 동그란 살구 열매가 달려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규문각
공자의 상과 위패가 모셔져 있는 대성전.
진나라 진시황의 분서갱유 당시 경전을 숨겼던 노벽.
대성전 뒤편으로 돌아가니 공자 집 우물 옆에 노벽(魯壁)이 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인문학을 구해낸 기적의 벽이다. 진시황이 책을 태우고, 유학자들을 흙속에 묻는 광기의 시대. 공자의 후손들은 담장 밑에 논어(論語), 상서(尙書), 춘추(春秋), 예기(禮記), 효경(孝經) 등의 경전을 몰래 숨겼다. 기원전 154년. 한나라 때 궁궐 확장 공사를 하다가 이 담장 밑에서 고문헌이 쏟아져 나왔다. 한무제는 발견된 이 경전들을 국가 이념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후 2000년의 중국 문명은 이 노벽 속에서 나온 글자들 위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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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림의 공자 사당으로 가는 길.
공묘와 공부를 둘러본 후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은 공림이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빽빽한 숲을 만나게 된다. 공림 안팎으로 10만 그루에 이르는 소나무, 측백나무, 편백 같은 고목이 우거져 있다. 공림이 ‘공자의 숲’인 줄 알았다. 그런데 중국에서 림(林)은 묘지를 뜻한다고 한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하는데, 중국인은 숲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공림은 기원전 479년 공자가 묻힌 곳이다. 취푸 시내 중심부에서 약 1km 떨어진 북쪽에 위치한 이 묘역은 7.25km의 담장 안에 약 10만 개의 무덤을 품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가족 묘지이자, 가장 큰 규모의 성씨 묘역이다.
취푸 도심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공림은 총연장 7.25km 담장 안에 약 10만 기의 무덤을 품고 있다.
논어에 나오는 ‘유어예(遊於藝)’ 글씨를 쓰고 있는 제녕대 장성리(張貹利) 교수.
공자 사당 앞에 자공이 심은 2500세 먹은 측백나무.
공자 무덤 앞에 있는 ‘대성지성문선왕’ 비석. 깨진 것을 이어 붙였다.
그런데 공자의 비석을 자세히 보니 깨어진 수많은 조각을 이어붙인 흔적이 있다. 1966년 문화혁명 당시 ‘파사구(破四舊·낡은 것을 깨부수자)’를 외치는 홍위병들에 의해 공자의 무덤이 파헤쳐졌고, 비석들이 깨뜨려졌고, 묘실 내 유물들이 약탈당했다. 또한 공림에 들어가는 입구 문의 붉은 벽에는 아직도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1966년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됐던 공림(孔林)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상처다.
누항 거리.
안회의 78대 직계 후손인 안틴간(颜廷淦) 선생.
양조장에서 숙성되고 있는 공부가주.
술 숙성 창고에 가 보니 공부가주가 커다란 갈색 항아리에 담겨 붉은 천으로 덮여 있다. 크기가 커졌을 뿐 한국 중식당에서 맛보던 익숙한 술병 모양 그대로여서 반가웠다. 막 증류한 67도짜리 고량주를 한잔 맛보았다. 부드럽게 목을 넘어간 술이 몸 속으로 들어가자 곳곳이 후끈해지면서 몸 속 내장의 위치를 확인 시켜준다.
산동성 지난시에서 만난 황허의 물결.
● 태산이 높다 하되
태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지난시에서 만난 황허 물결.
실제로 태산 인근 지난(濟南)시에 가보니 드넓은 벌판에 황토빛 황허(黃河) 물결이 세차게 흘러간다. 황허가 흘러가는 화북평원이 태산과 수직 수평으로 대비되면서 엄청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중국에는 오악(五嶽)이 있다. 서쪽 화산(華山), 동쪽 태산(泰山), 남쪽 형산(衡山), 북쪽 항산(恒山), 가운데 숭산(嵩山)이다. 그중 태산이 으뜸이다.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천하통일을 완수했음을 알리는 봉선의식을 태산에서 처음으로 했다. 이후 한무제, 광무제, 당 고종, 당 현종, 청 건륭제 등이 태산에 올랐다. 봉선의식 후 가뭄, 홍수, 지진 같은 재해가 발생하면 하늘이 황제 통치를 거부했다는 신호가 되기에 감히 시도조차 못한 황제도 많다. 태산 밑 대묘(岱廟)에는 청 강희제가 1689년 태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행렬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만주족 출신 황제가 680년 만에 봉선의식을 행함으로써 “하늘이 나를 황제로서 인정했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린 이벤트였다.
태산에 오르려면 7800계단을 걸어야 한다. 대부분 중천문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간 뒤, 남천문까지 걸어 올라가거나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태산은 최고봉인 옥황봉(玉皇峰)을 비롯해 곳곳에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사원이 있는 도교의 성지다. 그러나 태산은 유학자들도 꼭 한번쯤 찾아가야할 성지이기도 하다. 이는 공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태산 정상 부근에는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올랐다는 첨노대(瞻魯臺)가 있다. 첨성대(瞻星臺)가 ‘별을 바라보는 관측소’인 것처럼, 첨노대는 노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태산 첨노대.
태산을 찾은 황제와 문인들이 글씨를 남긴 대관봉.
동산을 올랐을 때 개인에서 국가차원으로 시야가 확장됐다면, 태산을 오른다는 것은 인간정신의 최고 경지에 도달해 우주적 관점을 갖게 된다는 걸 상징하는 표현이다. 조선시대 양사언의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에서도 ‘오르고 또 오르면’을 강조한다.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보인다(登泰山小天下)’라는 글이 쓰여져 있는 바위.
이처럼 태산 등산은 군자가 수양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도를 완성해나가는 것을 상징한다. 공자는 ‘대성(大成)을 통해 대성(大聖)이 된 스승’으로 불린다. 평생의 수양을 통해 크게 이루고, 결국 성인이 됐다는 공자. 그래서 공묘의 가장 큰 정전에는 ‘대성전(大成殿)’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태산 선인교.
공자가 태어난 니산 성지 기념관 내부.
공자의 고향인 중국 취푸와 태산에는 거리 곳곳에서 성현들의 어록을 만날 수 있었다. 공자가 태어난 니산(尼山) 성지에도 거대한 도서관이 마련돼 있다. 제녕대에서 열렸던 한중문화교류전시회 오프닝에서는 공자의 ‘논어(論語)’의 구절을 즉석에서 휘호로 써서 서로 나눠가졌다.
‘문질빈빈’을 쓰고 있는 본보 전승훈 기자.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무우수아카데미에서 장천 김성태 선생으로부터 캘리그라피를 5년 째 배우고 있는 기자도 중국측 교수들의 휘호에 답례하는 마음으로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글씨를 써서 선물했다. ‘문질빈빈’은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로 ‘내용(質, 바탕)과 형식(文, 꾸밈)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빛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군자는 마음을 맑게 닦을 뿐 아니라 문장과 음악, 예술까지 갈고 닦아 안과 밖이 모두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논어에 나오는 ‘견현사제(見賢思齊)’라는 글귀를 쓰고 있는 제녕대 쉬충 교수. ‘어진 사람을 보면 자기도 그와 같이 되려고 생각하라’라는 뜻이다.
공자의 후손을 만날 때에도, 안회의 후손과 식사를 함께 할 때도 시경(詩經)에 나오는 시를 읊고 노래하고, 성현들의 지혜가 담긴 말을 글씨를 써서 서로 주고 받았다. 자본주의적인 광고문구와 선거철 남을 비방하는 거친 언어가 담긴 현수막이 넘쳐나는 도시와 달리 이렇게 성현들의 지혜가 담긴 문구를 쓰고, 노래하고, 선물하며, 추억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풍경인가. 서로에게 덕담이 되고,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추억을 기념하는 것. 옛 선비들이 어떻게 ‘예에 노닐었는지’(遊於藝)를 보여주는 인문학적인 만남이었다.
논어에 나오는 ‘유어예(遊於藝)’ 글씨를 쓰고 있는 제녕대 장성리(張貹利) 교수.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