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개통 뒤 접근성 좋아진 우이동… 경성서 한나절 만에 꽃놀이하고 귀가 창동역 이용객 일 5000여 명까지… 임시열차 띄우고 도로 폭 3m로 넓혀 日, 우이 벚꽃에 식민서사 씌우려… 조선인단체도 찾는 근교 휴식처 돼
1918년 매일신보가 주관한 우이동 벚꽃놀이 행사에 시민들이 몰려든 모습.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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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관앵 명소’ 된 우이동
1934년 총독부 철도국이 발간한 ‘조선여행안내기’는 경원선 창동역을 “북한산 기슭의 쓸쓸한 역이지만, 벚꽃의 명소로 알려진 우이동으로의 하차역”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우이동은 “계곡이 아름다운 선경(仙境)으로 벚나무 고목이 무수히 많다. 벚꽃이 만발할 때에는 경성의 번잡한 세속을 떠나 관앵(觀櫻)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 “역에서 서쪽으로 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화계(花季)에 한해 승합자동차도 운행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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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창동역은 경원선의 기차역 중 청량리역과 의정부역 사이에 위치한 건물 세 동, 합계 50㎡(약 15평) 규모의 간이역이었다. 당시 행정구역상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도 각 정거장 중에서 창동역이 제일 작지만 1년에 내왕하는 돈으로 말하면 제일 많다”는 평이 있을 정도였다. 경성 근교에서 가장 유명한 벚꽃놀이 장소인 우이동으로 갈 수 있는 하차역이었기 때문이다. 창동역에서 우이동은 걸어서 1시간 거리였다. 철도의 개통은 경성 시내에서 우이동까지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1910년대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엽서에 담긴 우이동 벚꽃 풍경.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14년 개통한 경원선 노선도. 창동역 인근에 우이동이 함께 표시돼 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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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우이동 벚꽃놀이 기간에 맞춰 임시열차 운행을 알린 신문 광고.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우이동의 벚꽃은 언제부터 이렇게 유명해졌을까. 강제병합 전후 일본인들에 의해 ‘발견’되고 명소화된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고양군을 소개하는 잡지 기사에 “명승지로는 앵화 명소로 내외에 선전하는 우이동(일명 앵운동·櫻雲洞)”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다(‘경성의 번병인 고양군’·개벽 1924년 8월호). 다만 우이동의 벚꽃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새롭게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유래를 두고는 여러 설이 전해진다. 활 제작에 필수 재료인 벚나무 껍질(화피·樺皮)을 얻기 위해 심었다는 이야기, “우이동의 사꾸라는 군사상의 필요로 심었다”는 설(매일신보, 1915년 5월 5일)이 있다.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벚나무 묘목을 심은 데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앵을 구입하여 우이동에 이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매일신보, 1925년 3월 26일).
둘 다 확증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는 전자의 설명에 더 무게가 실린다. 후자의 설을 제기한 인물이 마쓰다 고(松田甲·1868∼1945)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측량 전문가인 마쓰다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종군하고 1911년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기사로 조선에 왔다. 1920년대 초 퇴직한 뒤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성에 정착해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사망할 때까지 관변 재야 학자로 활동했다.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조선과 일본의 역사적 교류를 주로 연구했다. 마쓰다의 관심은 조선과 일본이 오래전부터 여러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양국의 병합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증명하는 데 있었던 셈이다. 그가 설명한 우이동 벚꽃의 유래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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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여름 조선남녀학생기독교청년회연합회는 “동소문 밖 우이동”에서 “제2회 하령회(夏令會)”를 열고 “성서 연구”와 “조선 교회의 조직과 규칙”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수리조합과 소작인”이라는 조선 농촌의 현실 문제를 다루는 강연회도 진행됐다(중외일보, 1932년 8월 23일). 1932년 5월에는 천도교청우당 경성부가 “우이동 봉황각으로 춘기 원족(遠足·소풍)”을 갔다는 기록도 있다(매일신보, 1932년 5월 17일).
1939년에는 경성전기회사에서 창동역과 우이동을 연결하는 “전차를 놓는다고 세간에 풍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경성전기 측이 “우이동까지 전차를 연장한다는 것은 현재의 도로 관계로 보더라도 전도가 아득하다”고 공식 부인하면서 헛소문으로 판명됐다. 이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 자체가 우이동이 행락지로서 꾸준히 명성을 유지하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경성전기 역시 전차 노선 증설은 부인하면서도 “현재 운전하고 있는 버스만은 꽃구경 철이 되면 차대를 늘려서 증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매일신보, 1939년 3월 1일).
1941년 매일신보에 실린 ‘꽃과 하이킹’이라는 칼럼은 “전시하(戰時下) 국가는 우리 국민을 향하여 건강한 국민을 요구하고 명랑한 국민이란 무엇보다도 건강하고 명랑한 생활을 할 줄 아는 국민을 가리”킨다고 하며 건강을 위해 “서울과 같이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에겐 가끔 교외를 찾아 하이킹을 하는 것이 생활에 있어 여간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건강한 교외는 어딜까. “서울 근방으로 하이킹을 떠날 곳이 어데냐 하면” “가령 경원선을 이용한다면 창동역에서 내려서 가는 우이동이 있다”고 끝맺는다(매일신보, 1941년 4월 6일).
‘전시하’라는 표현에서 태평양전쟁을 목전에 둔 시대적 분위기가 읽힌다. 동시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창동역에서 내려서 가는 우이동”이 경성 시민들에게 ‘건강한 교외’의 하나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