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의료 서류에 머문 ‘존엄하게 죽을 권리’ 돌봄공백 속 병원 전전하는 ‘임종 난민’ 여전 치료 중단 뒤 돌봄계획 사전에 준비해 두고 정부-기업, 시민사회 함께 호스피스 키워야
김대균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2018년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뒤 우리 사회는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유보할 수 있는 법적 절차를 갖게 됐다. 중요한 진전이다. 덕분에 우리는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에 익숙해졌고, 죽음의 결정 방식에 대한 논의도 넓어졌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채울 문화는 아직 빈약하다. 임종기 돌봄의 부재를 다룬 기사에 안락사 옹호 댓글이 쏟아지는 현실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당기고 싶다는 철학적 결단이라기보다 “나를 홀로 고통 속에 내버려두지 말라”는 비명에 가깝다. 그 비명을 성급히 제도화 요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선택지가 연명의료와 안락사뿐인 것처럼 보일 때, 함께 돌보며 지켜내는 존엄은 시민의 상상 속에서 사라진다.
지금의 제도는 여전히 ‘서류 작성’에 머무는 경향이 강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는지가 중심이 되고, 정작 환자가 어디서 지내고 싶은지, 증상이 심해지면 어떻게 할지, 가족이 힘든 순간에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지에 대한 대화는 충분하지 않다.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 이후의 시간을 돌볼 사람이 없으면 환자와 가족은 다시 응급실과 병원으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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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계획만으로 마지막 시간이 지켜지지는 않는다. 약속을 현실로 만들 돌봄이 있어야 한다. 그 핵심 축인 호스피스·완화의료는 통증과 호흡곤란, 불안을 조절하고 필요할 때 입원과 가정 돌봄을 연결한다. 사전돌봄계획이 ‘어떻게 지내고 싶은가’를 묻는 일이라면, 호스피스·완화의료는 그 바람이 실제 삶의 마지막 시간 안에서 지켜지도록 돕는 전문 돌봄이다.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중심으로 우리 국민의 질 높고 안전한 생애 말기 돌봄을 실제로 작동하게 하려면 제도 설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가정과 요양원 등 익숙한 장소에서 생의 마지막 시기를 잘 보내기 위해서는 방문진료와 가정형 호스피스, 가족 돌봄 지원, 위기 시 필요한 단기 입원 병상까지 갖춰야 할 기반이 적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재정과 인력이 필요하다. 국가 재정이 기본이 돼야 하지만 시민사회와 기업의 참여도 함께 필요한 영역이다. 영국 등 죽음의 질이 높은 국가들이 정부와 민간이 결합한 모델로 호스피스를 키워 온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다만 호스피스가 여전히 ‘포기’의 이미지에 갇혀 있다는 점은 시민사회와 기업의 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생명을 살리는 분야는 기업의 사회공헌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죽음을 돌보는 일을 사회적 기여로 인정하는 문화는 아직 약하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가 생애 말기 돌봄을 위한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마중물 재원을 출연해야 한다. 이는 “마지막까지 돌봄받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국가의 선언이다. 국가가 먼저 책임의 신호를 보내야 기업과 시민의 참여도 뒤따르고, 호스피스도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공공 의제가 될 수 있다.
편안하게 죽고 싶다는 소원은 특별한 바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 바람은 개인의 각오나 가족의 헌신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미리 나눈 대화, 집으로 찾아오는 돌봄 인력, 밤에도 연결될 전화가 있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연명의료를 하지 않을 권리’를 넘어 ‘마지막까지 돌봄받을 권리’를 세우는 일이다. 서류에서 대화로, 병원에서 가정으로, 포기에서 돌봄의 책임으로 나아가야 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응급실과 요양병원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국가는 씨앗을 뿌리고 사회는 함께 물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배웅하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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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균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