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무역법원 ‘트럼프 패소’ 판결문에 밝혀 “단순 무역적자는 국가위기로 볼수 없어 무역법 122조 오용해 의회 조세권 침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일(현지 시간) 워싱턴DC 링컨 기념관에서 기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CIT는 “의회의 고유 권한인 조세권도 침해했고, 대통령이 원하는 정책 결과를 얻기 위해 특정 법 조항을 오용해 법치주의를 위배했다”고 질타했다.
● 美 수입기업-주 등 ‘글로벌 관세’ 소송
7일 CIT 홈페이지에 공개된 해당 판결문(Slip Op. 26-47)을 분석한 결과, 이 사건은 1974년 제정된 무역법 제122조(19 U.S.C. § 2132)를 근거로 트럼프 대통령이 발동한 ‘근본적인 국제 결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시적 수입 부과금 부과’ 명령에 미국 수입기업 등이 이의를 제기하며 다툼이 시작됐다.
광고 로드중
미국 헌법 제1조 8항은 의회에 세금, 관세, 임차료 및 소비세를 부과하고 징수할 권한을 부여했다. 1974년 무역법 제122조는 이러한 권한의 일부를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했다.
구체적으로 이 권한을 발동하려면 ‘근본적인 국제 결제 문제(fundamental international payments problems)‘가 생겨 수입을 제한하기 위한 특별 조치가 필요해야 한다. 세부적으로는 미국의 크고 심각한(large and serious) 국제수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또는 외환 시장에서 달러화의 급격하고 중대한 가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또는 타국과 협력해 국제수지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서여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갖춰졌다는 전제 하에 ‘150일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에 명령을 발동할 수 있다. 이 기간을 늘리려면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 “지급 불능에 준하는 등의 경제 위기 때만 발동 가능”
이 과정에서 법원은 무역법 제122조의 역사적 배경을 밝혔다.
광고 로드중
당시 대통령의 조치를 둘러싼 법적 다툼에서 관세법원은 권한을 넘어서 위법이라고 판결했고, 이후 항소법원은 대통령의 조치가 적법하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이후 혼란을 막기 위해 1974년 ‘예외적인 경제 조건’ 아래서 대통령은 이러한 관세 권한을 사용할 수 있다고 무역법 제122조 제정을 통해 명시적으로 위임하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근거로 올해 2월 20일 모든 미국 수입품에 10%의 글로벌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고 나흘 뒤부터 실행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수십 년간 지속된 막대한 무역 적자로 인해 심각하고 만성적인 국제수지 불균형을 겪고 있다”며 “최근 몇 년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심해져 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고 이유를 댔다. 그러면서 “미국의 순국제투자대조표(NIIP)의 급격한 하락은 국가 자산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이는 제122조가 상정하는 ‘심각한 국제수지 적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광고 로드중
7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DC 링컨 기념관을 이동하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 “단순 무역 적자는 심각한 국제 경제적 위기 아냐”
이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제122조가 제정된 1974년 당시의 입법 기록과 당시의 경제적 맥락을 보면 ‘국제수지 적자’는 국가가 대외 채무를 결제할 외환이나 금이 부족하여 발생하는 ‘국가적 지불 불능 위기’를 의미한다”고 했다. 단순한 무역 적자 수준이 아니라 미국이 지급 불능 정도의 사태에 처해야 이러한 권한을 대통령이 발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어 “단순히 수입이 수출보다 많아 발생하는 경상수지 적자는 변동환율제 하에서 자본 수입으로 상쇄될 수 있는 통계적 수치일 뿐”이라며 “대통령이 단순히 무역이 적자이므로 국제수지 적자라고 선언하는 것은 법이 규정한 특정 위기 상황을 입증하지 못한 채 권한을 행사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대통령 고시 제11012호는 제122조가 요구하는 ‘외환 시장에서의 달러화 가치 하락 방지’나 ‘국제적 위기 극복’이라는 목적과 무관하게 발령됐다”며 “이는 의회의 고유한 조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했다. 또 “대통령은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적 결과를 얻기 위해 특정 법 조항의 명칭을 차용했을 뿐이며, 이는 법치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을 즉각 중단시켜야 할 이유도 밝혔다.
법원은 “수입업자인 민간 원고들은 이미 부과된 관세를 납부함으로써 즉각적인 자금난과 사업 운영의 중대한 차질을 겪고 있다”며 “연방 정부를 상대로 한 관세 환급 소송은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그 사이 발생하는 사업적 손실은 금전적으로 완전히 보상받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정부가 법적 근거 없이 관세를 징수하는 것은 헌법이 정한 적법 절차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위법한 행정 집행을 중단시키는 것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며, 정부가 입는 세수 손실보다 원고들이 입는 헌법적 권리 침해의 정도가 훨씬 무겁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글로벌 관세 명령을 영구적으로 중단시킨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의 논리를 살펴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미국은 현재 국제적으로 지급 불능 등의 중대한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권한을 오용해 ‘관세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번 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에게만 효력을 미치지만, 법원의 논리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이후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소송에서도 트럼프 행정부는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판결에 불복해 트럼프 대통령이 제3, 제4의 보복 관세 조치를 내놓는다해도, 현재 미국의 상황이나 처지가 크게 바뀌지 않는 이상 그 또한 위법이라는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