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일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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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언론 인터뷰나 공식 석상에서 자주 쓰던 표현이 있다. “당 대표가 할 수 있는, 당 대표의 언어로 말씀드린다”는 것이다. 주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 문제 질문을 받으면 이같이 답했다. 윤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에 대한 확답은 피한 채 “이미 저는 분명한 입장을 밝혀 왔다”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장 대표는 지난달 7일 기자회견을 통해 당 쇄신안을 발표했다. 12·3 비상계엄과 관련해선 “책임을 무겁게 통감하고,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 절연 문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차 ‘절윤’에 무슨 입장이냐고 물으면 “특정 단어로 진정성을 따질 것은 아니다”라면서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 당 대표로서 낼 수 있는 입장을 냈고 당 대표로서 고민 끝에 낸 표현들”이라고 답했다.
입장 표명을 하고, 부연 설명도 했지만 여전히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장 대표가 언급한 “분명한 입장”은 결국 해석의 영역으로 남겨졌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도 “장 대표의 생각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외교가에서나 볼 법한 전략적 모호성을 당 대표가 구사하고 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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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전략적 모호성은 행동의 의도를 숨기고, 예측을 어렵게 만들어 상대방이 대응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민감한 현안에서 즉각 입장을 취하는 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모호한 태도로 책임을 잠시 피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이런 전략은 보통 ‘상대방’, 즉 다른 집단을 상대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데 진영의 리더인 제1야당 대표가 자신의 진영을 ‘상대방’으로 놓다 보니 보수 전체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확하지 않은 당 대표의 언어가 나올 때마다 오세훈 서울시장, 소장·개혁파 모임 ‘대안과 미래’ 등이 갈등을 무릅쓰고 “어서 ‘절윤’ 입장을 밝히라”고 반발 목소리를 냈다. ‘윤 어게인’ 세력은 또 그들대로 “윤 전 대통령을 버리면 장 대표를 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그런데 이제 그 ‘상대방’이 ‘절윤’을 요구하는 세력이라는 게 장 대표의 20일 기자회견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장 대표는 “사과와 절연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라며 “대통령과의 절연을 앞세워 당을 갈라치기 하는 세력, 단호하게 절연해야 할 대상은 오히려 이들”이라고 했다. 그동안 장 대표가 밝힌 당 대표의 언어란 당 전체를 아우르는 언어가 아닌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위한 언어였다는 점이 새삼 확인된 것이다.
장 대표의 언어에서 모호함이 걷히니 극한의 뺄셈정치가 남았다. 이제 지방선거가 4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당 지지율(한국갤럽 기준)은 더불어민주당과 2배 차이다. 장 대표는 이번 서울시장 부산시장 선거 결과에 자신의 정치 생명이 걸렸다고 했다. ‘절윤과의 절연’으로 치르는 선거가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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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일 정치부 기자 ji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