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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 패션쇼에 왜 시클라멘이 등장했을까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입력 | 2026-02-15 09:28:00

조나단 앤더슨의 첫 오뜨 꾸뛰르 쇼




ⓒDior


지난달 26일 프랑스 파리 7구 로댕 미술관은 거대한 꽃의 무대로 변해 있었다. 천장의 이끼 캐노피에 거꾸로 매달린 연보라색 실크 꽃들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겨울’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디올의 ‘2026년 봄·여름 오뜨 꾸뛰르(최고급 맞춤복)’ 쇼가 시작됐다.

꽃의 향연이었다. 왼쪽 어깨 위에 난초 장식을 드라마틱하게 얹은 드레스는 조형적 실루엣이 돋보였다.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시클라멘이었다.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모델들의 양쪽 귀에는 어른 주먹 두 개 만한 크기의 시클라멘 장식이 달려 있었다. 화분 식물로 흔히 보아온 시클라멘이 이토록 우아할 수 있다니.

ⓒDior


이번 쇼의 시작은 한 다발의 시클라멘이었다. 디올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은 쇼를 며칠 앞두고 접시 위에 놓인 시클라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했다.

“제 첫 오뜨 꾸뛰르 쇼를 존 갈리아노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는 검은 실크 리본으로 묶은 시클라멘과 테스코에서 산 케이크를 제게 가져다주었죠. 지금껏 받아본 꽃 중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쇼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존 갈리아노가 조나단 앤더슨에게 건넸던 시클라멘 한 다발. 조나단 앤더슨 인스타그램



북아일랜드 출신의 앤더슨은 어릴 적부터 디올의 전설적 디자이너 갈리아노를 동경하며 패션의 꿈을 키웠다. 런던 패션 칼리지를 졸업하고 자신의 브랜드 ‘JW 앤더슨’을 세운 그는 2013년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침체됐던 브랜드를 지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지난해 디올 수장에 오른 뒤, 첫 오뜨 꾸뛰르 쇼의 중심에 시클라멘을 내세웠다.

디올은 정원에서 태어난 브랜드다. 창립자 크리스찬 디올은 프랑스 노르망디 그랑빌의 바닷가 정원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평생의 미학적 원천으로 삼았다. 1947년 발표한 기념비적인 ‘뉴 룩(New Look)’은 잘록한 허리, 풍성하게 퍼지는 스커트를 통해 꽃봉오리가 만개하는 순간을 옷으로 구현했다.


지난해 서울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디올 전시. ⓒDior


디올은 창립 초기부터 꽃을 브랜드의 서사 장치로 활용해왔다. 특히 중요한 꽃은 은방울꽃이다. 크리스찬 디올은 은방울꽃을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며 컬렉션마다 은밀히 수놓았다. 장미도 중요한 모티프였다. 겹겹의 꽃잎 구조는 드레스의 볼륨으로 이어져 특유의 풍성한 실루엣을 만들었다. 이브 생로랑, 마르크 보앙, 지안프랑코 페레, 갈리아노에 이르기까지 디올의 디자이너들은 각각의 시대 언어로 꽃을 재해석해왔다. 이번 쇼에도 시클라멘뿐 아니라 은방울꽃과 장미 등 디올의 계보를 잇는 꽃들이 ‘창조적 연속성’으로 표현됐다.

디올은 이번 쇼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자연을 모방하며 항상 무언가를 배웁니다. 자연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진화하고 적응하고 인내하는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입니다. 오뜨 꾸뛰르 역시 그렇습니다. 전통적 장인정신과 실험적 시도가 복잡하게 얽힌 아이디어의 실험실이자, 오랜 세월을 견뎌낸 기법들이 살아있는 지식으로 승화되는 공간입니다.” 자연에서 오뜨 꾸뛰르의 갈 길을 찾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Dior



그렇다면 왜 시클라멘이었을까. 공식적인 해석은 없었기에 조심스레 이유를 헤아려본다. 시클라멘은 겨울에 핀다. 땅속에 단단한 덩이줄기를 품고 힘을 비축한 뒤 조용히 존재를 드러낸다. 꽃잎은 고개를 숙인 듯한 하트 모양이다. 디자이너가 교체되고 스타일이 달라져도 장인정신과 아카이브는 땅속에서 이어진다는 것, 겸손하게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을 더하겠다는 의지 아니었을까.

갈리아노가 후임 앤더슨에게 건넨 시클라멘은 브랜드가 자신의 서사를 어떻게 연출하고 확장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로댕 미술관을 채운 꽃은 살아있는 자연이 아니라 장인의 손을 거쳐 실크로 구현된 자연이었다. 디올에게 꽃은 자연의 상징이자 브랜드 자산이다. 아름다움과 전략은 무대 위에 나란히 선다.

디올 쇼가 끝난 로댕 미술관에서 어린이들이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모습. 조나단 앤더슨 인스타그램.


디올은 쇼가 끝난 후에도 로댕 미술관에서 일주일간 전시를 이어가며 어린이들을 위한 강연과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오뜨 꾸뛰르를 폐쇄적 특권의 영역에만 두지 않고 다음 세대의 문화적 유산으로 이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디올 쇼를 본 뒤 꽃집에서 사 온 시클라멘 화분을 위에서 찍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얼마 전 시클라멘 화분을 새로 집에 들였다. 평범하다고 여겼던 시클라멘이 유독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오지만 의미를 입히는 건 사람이다. 꽃은 그 자리에 있지만, 해석은 늘 우리 몫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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