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일한 대학가였던 ‘반촌’… 성균관 중심으로 특수한 마을 형성 유생들과 엮이며 ‘반인’ 세력 키워… 하숙집 주인이 징계 대신 받기도 ◇조선의 대학로/안대회 지음/240쪽·2만2000원·문학동네
책 ‘조선의 대학로’에 따르면 정조는 반촌을 둘러보며 “인재를 양성할 학교의 자리로 최적”이라고 감탄했다. 사진은 조선시대 성균관과 반촌의 풍경이 담긴 ‘정의사호성록(鄭義士護聖錄·1804년)’ 속 그림.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이 소장한 자료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제공
광고 로드중
그러나 성균관의 실제 풍경은 드라마와 괴리가 상당했다. 18세기 성균관 상재생(上齋生·급제를 거쳐 입학한 유생)의 평균 나이는 약 45세였다. 3년에 한 번 치러지는 식년시(式年試)의 바늘구멍을 통과하기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게다가 ‘남장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보다는 하숙집 사장 격인 반주인(泮主人) 가족과 정분이 나는 서사가 훨씬 그럴듯했다. 19세기 야담집 ‘청구야담’엔 유생이 반주인의 부인과 불륜을 저지른 일화가 등장한다.
오늘날 ‘대학로’로 통칭되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 혜화동 일대의 17세기 이후 풍경을 살핀 책이다. 조선시대 유일한 대학가이자 고시촌이었던 반촌(泮村)의 독특한 운영 방식과 변천사를 20개 주제로 나눠 풀어냈다. 풍부한 고문헌과 한시 등 자료가 뒷받침하는 덕에 전개가 탄탄하다.
광고 로드중
반주인을 소개한 대목이 특히 흥미롭다. 반주인은 유생에게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는 건 물론이고, 물건을 사다 주거나 유생 대신 징계를 받기까지 했다. 문과(대과) 급제를 위해 온갖 뒷바라지를 한 셈이다. 17세기 글 ‘검옹지림(黔翁志林)’에 따르면 유생이 벼슬에 오를 땐 후한 보상도 따랐다. 유생은 반촌 시절의 수고에 대한 대가로 반주인에게 큰 재물을 줬다. 이는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기보단 채무 이행에 가까운” 경우도 많았다.
고시촌이 있었으니 당연히 ‘스타 강사’도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18세기 반인 출신 교육자 정학수(鄭學洙)가 꼽힌다. 노비 신분인 수복(守僕)으로 오래 일했으나,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나 크게 인정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땐 한 제자가 시를 지어 “동쪽 서쪽 거리에서 샘 솟듯 울음 울며/마을 현인 잃었다며 모두가 곡을 하네”라고 애도했다. 저자는 “당대 한양 사람은 반촌과 반인을 따돌리고 천시했으나, 반인들은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고 평했다.
반촌은 20세기 들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균관의 위상은 추락하고, 반촌의 역할도 없어졌다. 사람 냄새 물씬한 반촌의 세계에 푹 빠져든 독자라면 아쉬운 마음에 발길이 절로 대학로로 향할지도 모르겠다.
광고 로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