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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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고대 희랍어는 문자로만 남아있는 사어(死語)라 오히려 배우는 재미가 있다”며 “유럽에서 근무하던 시절 익힌 언어들이 실용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오로지 ‘책을 읽기 위한 공부’라 즐겁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첫 부분을 원어로 읽어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인공지능(AI) 번역과 요약이 일상화되면서 언어 학습은 이전과는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AI가 다 해주니 외국어는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흐름과 반대로, 고대 그리스어·산스크리트어처럼 실용성과 거리가 먼 언어를 배우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원전을 몇 달에 걸쳐 완독하는 등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인 공부’에 나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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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유를 남긴 언어다. 플라톤 연구로 석사, 호메로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고전학자 강대진 씨는 “2500년 전 언어지만, 일상에 가장 깊숙이 스며든 언어 중 하나”라며 “헤게모니, 패러다임, 카리스마 같은 단어도 희랍어에서 왔다. 사람들에겐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욕구가 있고, 희랍어는 그 갈증을 채워준다”고 했다. 강 박사는 최근 ‘쉽게 배우는 고전 그리스어’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스·로마 고전 강독 수업’에 참여 중인 주부 황경화 씨(57)는 최근 번역본 독서를 넘어 희랍어 공부를 시작했다. 황 씨는 “고전 읽기도 어느덧 6년이 됐으니, 희랍어 역시 평생 공부라 생각한다”며 “인생에서 금요일 하루만큼은 고전을 읽는 시간으로 두려 한다”고 했다.
소설 ‘희랍어 시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해되지 않는 언어 앞에 멈춰 서는 시간은 삶의 리듬을 바꾼다고. 강 박사는 “AI 시대에 어떤 언어라도 실용성은 큰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무익한 것’을 해보자는 제안”이라며 “고귀함이란 무용한 걸 계속하는 것이란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 AI가 따라올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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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어에는 논리 접속사가 붕괴되는 지점이 종종 나타나요. 인과와 역접이 동시에 성립하는 식이죠. 그걸 이해하려면 개인의 논리 자체가 흔들리는 지점까지 가야 합니다. 일종의 소크라테스식 산파술이죠. 고전 텍스트 영역은 AI가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를 취미로 독학하는 직장인 이모 씨(29)도 “AI가 검은 밤바다처럼 밀려오는 시대에,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무언가를 배워 간직할 수 있는 게 기쁘다”고 했다.
옛 언어를 배우는 이들의 마음은 비슷하다. AI가 결과를 손쉽게 제공하는 시대지만, 이들은 어떤 이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공부의 의미 역시 재정의돼야 한다고 했다.
“공부 자체를 좋아하고, 자기 마음을 단련하는 여정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생깁니다. 한국어만 봐도 수많은 언어가 뒤섞여 형성됐잖아요. 요리사가 재료를 하나씩 꺼내 보듯 한자와 문법, 어원을 들여다보는 식이죠. AI 시대에 모두의 독해력이 낮아질수록, 고어를 통해 독해력을 기르는 건 또 다른 힘이 될 수 있습니다.”(최성웅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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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