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행복, 비극까지도 모두 바다 깊숙이 묻었다. (…) 나는 타국의 땅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이성자·1918~2009)
전쟁으로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20세기 여성 화가들이 있다. 레바논 출신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아드난은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고, 이성자는 6·25전쟁 발발 이후 자식과 이별해 프랑스로 이주했다. 이역만리에서 이들은 각자 전쟁의 상흔을 안고서 남성 작가 위주이던 추상 미술계에서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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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텔 아드난과 이성자의 2인전 ‘태양을 만나다’. 화이트큐브 서울 제공
에텔 아드난의 ‘Farandole’. 화이트큐브 서울 제공
이성자의 작품에선 우주가 따뜻하고 생기 있는 색감과 기하학적 도형으로 리듬감 있게 그려졌다. 초현실주의 화가 앙리 괴츠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마치 직물을 짜듯 치밀한 격자무늬로 이뤄진 화폭은 아드난의 태피스트리 작업과도 무척 닮아 있다.
이성자의 ‘The Vivid Dews’. 화이트큐브 서울 제공
두 작가는 작품을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한 공통점도 지녔다. 전시장에 나란히 걸린 아드난의 ‘무제’(2014년)와 이성자의 ‘Le Temps Sans Obstacle(장애물 없는 시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산봉우리를 그린 ‘무제’는 마른 땅의 황토색, 백향목(Lebanon Cedar)의 짙은 초록색 등 레바논 자연을 연상시키는 색조가 두드러진다. ‘장애물 없는 시간’에는 붉은 태양이 희뿌연 하늘에 떠오르지만 이내 단단한 능선에 가로막힌 듯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고국에 두고 온 자녀를 그리워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우주를 향한 동경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것도 닮은꼴이다. 메이 디렉터는 “1960년대 우주 탐사에 대한 세계적 열기가 두 작가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아드난은 소련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죽음을 기리며 1968년 시 ‘최초의 우주비행사를 위한 장례 행렬’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여행은 끝났고 또 다른 여행이 이제 막 동텄다”는 대목은 두 이민자 화가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3월 7일까지.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