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교토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중 단 한 장을 고르라면 나는 이 사진을 꼽겠다. 시가지에서 비켜나 2차선의 작은 도롯가에 있던 칼 전문점 하야카와 하모노텐. 언뜻 작은 철물점처럼 보이는 가게 안에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느릿한 몸짓으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벽안의 외국인이었는데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였다. 우리 일행이 들어가려 하자 부대낀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계산을 위해 오랫동안 줄을 서 있던 눈치였다. 저 사람들이 다 나오면 편히 들어가자 하는 마음으로 바깥에 자리를 잡으려던 순간, 유리창에 붙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자로 또박또박 눌러 쓴 영어였다. 문장을 따라 읽어 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고객분들께. 제 가게를 방문하기 위해 저 멀리에서 와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1937년에 태어났고 혼자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어를 못 해 여러분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불편함을 끼쳐 드리네요. 죄송합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공지를 드립니다. 이 가게는 2027년 6월에 문을 닫습니다. 2027년은 저희 집안이 가게를 연 지 딱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광고 로드중
창밖으로 들여다본 할아버지의 몸짓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손님들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 칼에 구매자의 이름이나 상호를 새겨주는 인그레이빙 서비스도 해 주었다. 한편에 그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도 있었다.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이름과 추억이 담겨 있을까. 그렇게 우리 모두의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가다 어느새 막바지 길에 가 닿는다. 노환으로 와병 중인 어머니와 장모님을 보며, 그 마지막 길이 덜 아프고 덜 서러웠으면 하고 바란다.
다시 새해가 밝았다. 분명 설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어둠의 그림자처럼 불안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나는 이 일을 얼마나 더 오래 할 수 있을까. 일 없이 그 긴 노년을 어떻게 보낼까. 건강은 괜찮을까. 얼마나 더 남았을까…. 그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은퇴의 시점을 스스로 깔끔하게 공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름답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