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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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던 보험사의 화끈한 말은 보험금 청구를 할 땐 싸늘하게 바뀌곤 한다. 사전고지 의무를 위반했다느니, 별도 특약이라느니 깨알 같은 약관엔 보험금을 줄 수 없는 이유만 빼곡하다. ‘무조건 보장’이란 말을 믿었기에 더 쓰라리다. 요즘 반도체 기업들의 심정이 딱 이렇다. 틈만 나면 반도체가 나라의 미래라며 파격적으로 지원하겠다던 정부와 정치권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발목을 잡는다.
앞으론 파격 지원, 뒤로는 발목 잡기
일주일 전 SK하이닉스는 ‘반도체 공장 투자 관련 설명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반도체 분야에 한해 지주회사 규제를 완화하는 정부 방안이 특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해명했다. 당초 이재명 대통령은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첨단 산업에 자금 조달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금산분리 완화를 언급했는데, 공정거래위원장이 “몇몇 회사의 민원 때문에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하면서 엉뚱하게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의혹으로 불똥이 튀었다. 결국 기업이 나서 기존의 자금 조달 방식으론 투자 재원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대국민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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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원 법안이던 ‘반도체 특별법’은 결국 또 해를 넘겼다. 2024년 22대 국회가 문을 열 때부터 여야 모두 한목소리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지만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 근로 예외’ 조항 적용을 놓고 다투다가 1년 넘게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핵심 쟁점을 뺀 반쪽짜리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여야가 합의했지만 그마저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부는 비(非)수도권의 반도체 R&D 인력에 대해선 근로시간 규제 완화를 검토할 수 있다며 지역균형발전과 엮어 보려고 한다. 시험 잘 치라고 응원한다면서 밤엔 공부하지 말라고 강제 소등시키니 수험생은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다.
전쟁을 하는 건지 전쟁놀이를 하잔 건지
우리가 입으로만 파격적 지원을 외치는 동안 해외 각국은 립서비스가 아닌 진짜 지원을 하고 있다. 공장 건설 발표부터 가동까지 불과 28개월 만에 끝낸 일본 구마모토의 TSMC 파운드리 공장이야말로 파격이다. 외국 회사의 공장을 건설하는 비용의 절반을 댄 일본 정부의 조치가 파격적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소리를 들어 가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반도체 자립에 다가선 중국 정부의 지원이 전폭적이다.
지난해 12월 10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는 전쟁 작전 회의 같은 분위기였다. 서부전선(중국), 동부전선(미국), 아군의 전력 열세 등의 용어를 쏟아내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 철저하게 대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게 실제 전쟁이라면 한국의 전비 태세는 암울하다. 지휘부는 입으로만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여론은 적전분열 상태인 데다 보급마저 시원찮다. 세계는 밤새워 불을 밝히며 덤벼드는데 우리는 균형발전과 건강권을 강조하며 ‘군자는 기습하지 않는다’는 송양공 식의 전쟁을 하고 있다. 한국에 유일하게 남은 초격차 산업인 반도체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왜 이리 한가한가. 전쟁이 아닌 전쟁놀이만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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