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정 산업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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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외환시장이 얼어붙고 달러가 귀해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가계와 기업의 몫이었다. 특히 경제부 은행 담당 기자로 현장을 뛰며 만났던 ‘키코(KIKO)’ 피해 중소기업들의 절망적인 표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녹인, 녹아웃(Knock In, Knock Out)’의 약자인 키코는 글로벌 금융위기 전 수출기업들이 대거 가입한 파생상품이었다. 일정 범위 안에서 환율이 움직이면 기업으로서는 약정한 환율에 달러를 팔 수 있는 권리가 생겨 리스크를 덜 수 있다. 그러나 환율이 일정 상한선 이상으로 올라가면 시장 환율과는 무관하게 낮은 약정 환율로 달러를 은행에 넘겨야 했다. 결과적으로 키코로 인해 700여 개 기업이 3조 원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
2025년 12월, 그 악몽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480원에 육박하며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 온 1500원까지 위협하고 있다. 통상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글로벌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기업에는 유리하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이 공식은 더 이상 현재의 글로벌 공급망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업들은 ‘국산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분업 구조 속에서 ‘조립된 결과물’을 수출하는 까닭이다. 원자재와 중간재, 부품 상당수를 달러로 수입하는 구조에서 환율 상승은 곧바로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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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기초 체력, 협상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들의 부담은 말할 것도 없다. ‘제2의 키코’ 사태 가능성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키코 사태 이후 환 헤지 상품의 구조는 분명 개선됐다. 손실 한도를 제한하거나, 기업에 불리한 조건을 완화한 상품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이번 환율 급등은 상당수 기업의 예측 범위를 벗어난다. 특히 대기업과 달리 환 위험 대응 여력이 제한적인 수출 중소기업 가운데 1500원 선까지 환율이 급등할 가능성을 전제로 전략을 짠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키코 사태처럼 대규모는 아니어도 상당수 기업이 키코 유사 상품에 발이 묶여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환율이 장기화되자, 대통령실과 정부는 대기업과 대형 증권사를 잇달아 소집하며 환율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긴급 처방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기업과 증권사를 동원해 환율을 억누르는 데는 한계가 명확하다. 해외 투자계획을 가진 기업들로 하여금 달러를 억지로 풀게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며, 수익을 좇는 서학 개미를 멈춰 세울 수도 없다.
환율은 시장의 수급이 만들어내는 결과다. 지금의 고환율은 단순한 일시적 변동이 아니라, 한국 시장과 원화에 대한 신뢰와 매력도가 구조적으로 약화됐다는 신호다. 성장 둔화, 정책 불확실성, 지정학적 리스크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다면 이를 제대로 진단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 원화의 신뢰를 회복할 전략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고환율은 일상이 되고 기업들의 ‘키코 트라우마’는 또 다른 이름으로 반복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섣부른 압박이 아니라 냉정한 진단과 대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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