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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절반은 여성이니까” 자동차 충돌 모의실험에 ‘여성 더미’ 승인

입력 | 2025-11-25 16:03:41

미 연방도로교통안전국이 여성 체형 더미 ‘THOR-05F’의 도입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자동차 안전 설계의 기초가 되는 충돌 실험에 여성 더미를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AP/뉴시스


자동차 안전 설계의 핵심인 미국 연방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모의 충돌 실험’에 여성 더미 사용이 승인됐다. 이는 60년 만의 변화로, 남성 체형을 중심으로 설계돼 온 자동차 안전장치를 흔들 계기가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23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 연방도로교통안전국은 최근 여성의 체형을 바탕으로 한 충돌 시험용 더미 ‘THOR-05F’ 사용을 승인했다. 이번 승인으로 여성 운전자까지 포괄하는 안전 설계의 필요성이 부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성형 더미 ‘THOR-05F’의 설계도. 체형의 굴곡 및 쇄골·골반 등 해부학적 차이가 반영됐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

새로 도입된 더미의 크기는 키 150cm, 체중 50kg으로 여성 의 평균 체형을 본따 만들어졌다. 목과 쇄골, 골반, 다리의 굴곡의 차이를 부여하는 등 해부학적 차이를 반영해 실제 인체에 가깝게 구현했다. 또한 내상을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한 센서도 150개가 넘게 탑재됐다. 이를 허가한 정부 당국은 “더 견고하고 더 정확하며 더 인간과 닮았다”고 평가했다.

그간 차량 충돌 모의 실험은 1970년대 평균적인 미국 남성을 본뜬 ‘하이브리드 III(Hybrid III)’를 채택해 왔다. 이 인형의 크기는 키 175cm, 체중 77kg으로 평균적인 여성의 체형보다 현저히 크다.

여성 더미 인형이 충돌하는 모습. @driveactionfund 갈무리

 미국 연방 정부에 따르면, 여성 운전자는 교통사고 시 남성 운전자보다 중상을 입을 확률이 73% 높고 사망 가능성도 17% 높다. 2005년 정부 보고서는 이 같은 남녀 간 안전 격차의 상당 부분이 ‘차량의 설계와 기술’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여성 더미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과거에도 있었다. NHTSA는 2011년 평가 시스템을 개편해 이번에 승인된 THOR-05F와 비슷한 체형의 더미를 활용한 시험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 더미를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뒷좌석에만 배치하도록 해 “여성 운전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 비용 부담이 변수…“개선 비용 737억 추산”

50년 이상 사용되어 온 ‘하이브리드 III’ 남성 충돌 테스트 더미의 모습. 이 더미는 1970년대 평균적인 미국 남성 체형을 본따 만들어졌다. AP/뉴시스

자동차 업계의 반응은 냉담하다. 자동차 보험사와 보험협회가 출연한 비영리 단체인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는 “최근 몇 년 사이 남녀 간 부상 위험 격차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내놓으며 여성 더미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협회 대변인 조 영은 남녀 간 부상 위험 격차를 줄이는 방안은 가상 충돌 실험으로 충분하다며 “새로운 안전 측정 도구를 계속 검토하고 있지만 현 시점에서 충돌 인형을 바꿀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비용 부담도 변수다. 더미 한 기 가격은 100만 달러(14억 원) 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여성 더미 도입에 따른 자동차 업계 전체 비용을 5000만 달러(737억 원) 이상으로 추산했다.

현재 미 하원에는 여성 더미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제출된 상태지만, NHTSA의 차량 안전 시험이나 미국 연방 자동차 안전기준에 실제로 포함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 시민단체 “정부 결정 환영…싸움 아직 안 끝나”

드라이브 액션 펀드(Drive Action Fund)의 마리아 웨스턴 쿤 대표가 2019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의 모습. 당시 쿤 대표는 뒷좌석에 탑승한 자신과 어머니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앞좌석에 탑승한 아버지와 남동생은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밝혔다. @driveactionfund 갈무리

여성 안전을 위한 시민단체 ‘드라이브 액션 펀드(Drive Action Fund)’의 마리아 웨스턴 쿤 대표는 정부 결정을 환영하며 “이번 진전의 공은 트럼프 행정부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뉴욕대학교 로스쿨 학생인 쿤은 2019년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 뒷좌석에 앉아 있던 자신과 어머니는 다쳤지만 앞좌석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여성 더미 도입을 위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쿤 대표는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자동차 회사들의 입장을 들을 차례”라고 말했다. 

여성 더미 의무화 법안을 발의한 네브래스카주 공화당 상원의원 데브 피셔는 “이번 조치를 통해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하고 모든 운전자를 위해 미국 도로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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