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이언 매큐언 지음·민승남 옮김/696쪽·2만2000원·문학동네 70대 중반 다다른 英 소설가 신작… 한 인물의 인생 다룬 자전적 소설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탐구… 순간의 결정이 삶의 방향 바꾸기도
첫 자전적 소설에서 70여 년에 걸친 인생사를 통해 개인의 삶과 역사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부커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을 수상한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신작 ‘레슨’은 바로 그런 장면으로 문을 연다. 열한 살 기숙학교 소년 롤런드가 좁은 방 안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 강압적이면서도 어딘가 유혹적인 여교사와 단둘이서. 그녀가 불현듯 소년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덮치는 순간, 소년은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를 포착한다. 바깥세상이 밀려들며 내밀한 공간을 흔드는 찰나다. 세상에 완전히 개인적인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레슨’은 개인의 삶과 역사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하는 소설이다. 가장 사적인 순간에 역사가 개입해 그것을 무너뜨리거나, 혹은 뜻밖의 방향으로 밀어주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매큐언은 세계사와 일상의 경이로운 얽힘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 롤런드 베인스의 삶을 70여 년에 걸쳐 추적한다.
광고 로드중
소설 곳곳에는 ‘만일’로 시작하는 사고실험이 등장한다. 만일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케네디가 해군을 보내 그 섬을 봉쇄하지 않았더라면, 롤런드는 그날 자전거를 타고 선생의 시골집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학에 진학해 어문학을 공부하며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작은 역사적 결정이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는 점에서, 매큐언은 ‘역사’와 ‘사생활’의 경계를 끊임없이 뒤흔든다.
‘속죄’, ‘칠드런 액트’, ‘암스테르담’ 등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쓴 이언 매큐언. 사진 출처 이언 매큐언 홈페이지 ⓒAnnalena McAfee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한 인물에 대한 긴 인생 서사가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읽는 즐거움은 확실하다. 특히 각 시대를 풍미한 음악과 패션으로 세월의 질감을 드러내는 대목들이 그렇다. 열네 살 롤런드는 존 메이올과 에릭 클랩턴의 영향을 받아 머리를 길렀고, 롤링 스톤스 공연에서 본 브라이언 존스의 블랙진에 매료돼 발목이 낀 듯한 바지를 즐겨 입었다. 존 레넌보다 먼저 플라스틱 안경테를 착용하기도 했다. 사소한 취향과 유행의 단면 속에서 개인이 시대와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매큐언은 정교한 세필로 그려낸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