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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絃 위에서 들려온 시의 숨결… 천 번의 어둠 끝에서 길어 올린 生의 울림

입력 | 2025-10-16 03:00:00

[한시를 영화로 읊다] 〈116〉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읊다




천카이거 감독의 ‘현 위의 인생’(1991년)에서 시각장애인 제자는 역시 눈이 보이지 않는 스승에게 별들은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 스승은 자신도 본 적이 없기에 하늘에 있는 폭포 같다고 했다가 돌 같기도 하다고 대답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어렵건만 다섯 살 때 눈이 먼 명말청초 당여순(唐汝詢·1565∼1659)은 추억 속 공간과 기억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시인은 이별이 못내 아쉬워 잠 못 이뤘던 듯하다. 모래톱 위로 낙엽 지는 소리가 유독 청각을 자극한 이유는 술이 깬 탓도 있지만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서일 것이다. 시인은 그리움을 함께 놀던 장소와 푸른 수양버들의 기억으로 연결시켰다. 시인은 자신에겐 보이지 않는 공간과 색깔로 그리움을 윤색하였다.

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여인의 향기’(1992년)에도 군대에서 사고로 시력을 잃은 퇴역 중령 프랭크가 나온다. 그는 볼 수 없지만 향수와 비누 냄새만으로 마주친 여성의 특성을 파악하여 자신을 보살피는 고학생 찰리를 놀라게 한다. 프랭크는 찰리에게 그 비결을 “작은 것을 종합하면 큰 것을 볼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영화 속 프랭크가 후각을 활용해 보이지 않는 세상을 파악했다면, 시인은 오로지 기억에 의지해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만들어 갔다. 시인은 형들이 시 낭독하는 소리를 듣고 암송해서 공부했다고 하는데(陳衎, ‘唐仲言·李公起’), 각고의 노력 끝에 당시(唐詩)에 대한 탁월한 해설서인 ‘당시해(唐詩解)’를 쓰기도 했다. 동시대 유명 문인이었던 종성(鍾惺)은 시인을 만나 본 뒤 글자의 형태조차 알지 못하는데도 해박한 주석을 작성한 것에 대해 경탄했다(‘贈唐仲言序’). 이수광이나 이규경 같은 조선 문인들도 ‘당시해’의 저자가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화 ‘현 위의 인생’에서 시각장애인 악사는 자신이 깨달은 삶의 의미를 노래하며 사람들을 깨우쳐 준다. 현대휠코 제공

영화 ‘현 위의 인생’에서 장애는 인간 자체의 결함과 삶의 고통을 보여주는 알레고리(allegory)이기도 하다. 영화 속 삼현금(三絃琴)을 타는 시각장애인 악사는 한평생 악기의 현(줄)이 천 번 끊어지도록 연주하면 눈을 뜰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현이 천 번 끊어진 뒤에야 그 바람이 헛된 것임을 확인하곤 인생살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원작 소설에선 우리의 인생이 이 현과 같아서 삶의 목적은 허구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한다(스톄성·史鐵生, ‘현 위의 인생’). 벼슬도 없이 한평생 고단한 삶을 살아간 시각장애인 시인에게 시는 어떤 의미였을까? 영화 속 악사의 삼현금처럼 시는 시인의 삶을 지탱하는 팽팽한 생명의 줄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눈뜬 자들도 읽어내지 못하는 시의 웅숭깊은 의미를 길어 올렸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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