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라슬로의 문학세계 그에게 종말은 ‘사건’이 아닌 ‘상태’ 느리고 고통스럽게 종말 과정 그려… 탈출 희망 없다는 점 카프카와 유사 질식할 듯 쏟아지는 만연체 특징… 그 속에서도 라슬로식 ‘유머’ 빛나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은 문단 구분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마치 빽빽하게 써 내려간 ‘깜지’를 보는 듯한 시각적 체험을 선사한다. 내년 한국어로 출간 예정인 최신작 ‘헤르슈트 07769’는 원서로 분량이 약 400쪽에 이르는데, 한 문장으로 이뤄져 마침표가 마지막에 한 번 나온다. 사진 출처 작가 공식 홈페이지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시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끝내 그는 마지막 무기처럼 지녀온, 안식처로 한 번 더 돌아가고픈 희망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라는 돼지우리 속에서 태어나 갇혀 있지. …그리고 오물 속에 뒹구는 돼지들처럼 뭐가 어찌된 건지도 모르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젖꼭지를 향해 아우성치지. 사료 통으로 빨리 가려고, 밤이 되면 침대로 돌아가려고 허둥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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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선 무얼 더 기다리시는 걸까? 어째서 이 소돔과 고모라를 가만히 보고 계시기만 할까?”
1980년대 헝가리의 해체된 집단농장. 오갈 데 없는 몇몇 주민만 마을에 남아 극도의 가난을 버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들은 술에 진탕 취해 “오물 속에 뒹구는 돼지들처럼” 탱고를 춘다.
9일(현지 시간)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헝가리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 ‘사탄탱고’(1985년)의 한 장면이다. 국내엔 지금까지 6권이 번역 출간된 그의 소설은 질식할 듯 말이 쏟아지고 이미지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에 그의 작품이 생경한 독자라면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을 수도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문학 세계의 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특징들을 전문가들과 함께 살펴봤다.
● 묵시록과 카프카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로 “묵시록적 공포 속에서 예술의 힘을 재확인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런데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소설에서 ‘종말’은 폭발처럼 닥치는 ‘사건’이 아니다. 이미 시작된 뒤 끝없이 이어지는 ‘상태’다. 이는 작가의 관심이 파국으로 향하는 길에 있지 않고, 이미 끝나버린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지리멸렬하게 버티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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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도 마찬가지다. 종말은 느리고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그려진다. 마을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서 그 속을 배회한다.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2016년 집필) ‘서왕모의 강림’(2008년) 등 작가의 주요작을 우리말로 옮긴 노승영 번역가는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운명 또는 신의 뜻의 작용을 받는다는 점에서 마치 대본이 이미 쓰인 연극의 등장인물 같다”고 설명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에게 다가가는 또 다른 키워드는 ‘카프카’다. 작가가 “카프카를 읽지 않을 때는 카프카를 생각한다. 그러지 않을 때는 그를 그리워한다”고 말할 정도다. 조원규 번역가는 “‘사탄탱고’는 탈출의 전망이 부재하는 고통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분명 카프카적 상황을 그린 소설”이라며 “카프카가 단독자를 그린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군상을 등장시킨다”고 했다.
● 의외의 유머가 곳곳에 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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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작품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 ‘서왕모의 강림’(왼쪽부터). 알마 제공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