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북한 조선중앙TV에서 방영된 ‘해외작전부대 지휘관, 전투원들을 위한 축하공연’의 한 장면. 자폭을 두 차례 시도해 죽었다는 군인이 찬양된다. 조선중앙TV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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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 특수부대 300명이 가서 점령당한 도시를 탈환했는데, 한 명만 전사했대. 너무 잘 싸워서 6월에 우리나라에 온 푸틴 대통령이 ‘특수작전에서 공을 세운 조선 동지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대.”
“비행사도 많이 갔는데, 거의 다 죽었대. 우크라이나 대공망이 너무 강해 자폭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길영조의 아들 길훈이도 죽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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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영조는 북한이 크게 내세우는 ‘비행사 육탄 영웅’이다. 1993년 원산 상공에서 비행기가 고장 나자 김일성 동상에 추락할까 봐 탈출을 포기하고 바다로 기수를 돌렸다고 선전한다. 그의 아들 길훈은 대를 이어 비행사가 됐고, 2014년엔 김정은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6·25전쟁 때 소련이 비행사를 몰래 보내 북한을 도왔고, 북한도 베트남전에 비행사부터 은밀하게 파병했음을 고려하면 비행사 파병설은 무시할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이전의 특수전 병력 파병은 그냥 소문에 불과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당시 북한군과 싸웠다는 말이 없었다.
이런 소문은 왜 퍼졌을까. 북한 당국이 파병에 앞서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미리 영웅담을 만들어 ‘군불’을 피웠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보도가 실종된 북한에선 소문의 힘이 매우 강하다. 이런 점을 역이용해 북한은 오래전부터 소문을 전문적으로 퍼뜨려 유리한 여론을 만드는 비밀 팀을 운용하고 있다. 주로 은퇴한 고위급 노동당 간부 출신들이 평범한 노인으로 위장해 역전 등 공공장소에서 지시받은 소문을 퍼뜨린다.
파병 소문이 퍼지던 시기, 즉 김정은의 공식 지시 이전에 북한에선 러시아로 파병될 군인들을 비밀리에 뽑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에 농사지으러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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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특징은 하층민들의 자녀들이며, 닫힌 지역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산골 오지에서 자라다 보니 한류 등으로 오염되지 않아 세뇌가 잘 먹힌다. 산골 하층민은 죽어도 소문이 산을 하나 넘기 어렵다. 힘없는 부모들은 불만을 터뜨릴 엄두도 못 낸다.
반대로 평양 등 대도시의 간부 자녀들은 파병군에서 제외됐다. 간부는 불만 세력이 되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 또 이들의 자녀들은 한국 드라마 등 외부 문물을 많이 접한 소위 ‘깬 세대’이기에 세뇌가 잘 먹히지 않는다.
1만2000명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파병군이 특수부대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죽어도 괜찮을 군인들을 뽑아 구성한 부대였다. 물론 전투엔 대체로 특수부대 소속 군인들부터 투입됐겠지만, 특수부대 자체가 가난한 집 자식들이나 가지, 간부 자녀들은 거의 가지 않는다. 훈련이 매우 고되고, 중간에 자식을 대학으로 빼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이 해외 작전부대 전사자 101명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며 유가족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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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모른 채 산골에서만 자란 청년들은 “나의 자결로 가족의 운명이 바뀐다”고 믿는다. 농장과 탄광, 군수공장 근로자의 자녀는 신분이 세습된다. 군복무를 마치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아 산골로 돌아간다.
이들에게 자폭은 가족을 ‘천민 세습 지역’에서 해방시켜 평양 시민으로 재탄생시키는 자기희생이다. 실제로 가족은 평양 거주라는 보상을 받았다. 이처럼, 김정은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을 자폭 찬가가 넘치는 광신도의 땅으로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