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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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기자가 사는 아파트 게시판에 공고가 붙었다. 20년 된 승강기의 메인 로프와 시브(도르래) 교체 작업을 맡길 공사 업체 선정 알림이었다. A4 2장짜리 공고문에서 유난히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입찰 종류: 최저가 입찰.’ 주민들이 매일 타는, 안전에 직결된 승강기 장비를 교체하는데 가장 싼 값을 부르는 업체에 맡긴다는 뜻이다.
승강기 특성상 부품 제작 방식, 재질, 납품처 등은 대체로 정해져 있을 터. 가격을 일정 수준 밑으로 떨어뜨리긴 어려울 것이다. 엘리베이터 수리같이 기술이 필요한 일에서 공임을 낮추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쥐어짤 곳은 안전 비용이다. 말로는 “안전에 돈을 아끼지 말자”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가장 싸게 해 줄 곳을 찾는다.
말과 행동이 다른 ‘안전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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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생각도 약하다. 최근 서울 대단지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심심찮게 터지는 시공사와 조합원의 공사비 갈등이 대표적이다. 시공사는 안전조치 강화, 근무시간 제한 등으로 비용이 늘어 공사비를 증액해야 한다고 하지만, 조합원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부도 다르지 않다. 안전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발주하는 공사의 낙찰 구조는 여전히 최저가 입찰 중심이다. 정부부터 ‘싼 게 좋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니 민간도 너 나 할 것 없이 최저가로 결정한다.
“안전 비용 때문에 공사비를 올려야 한다”는 건설사 말을 어디까지 믿을지는 철저히 검증해 봐야 한다. 하지만 낮은 금액이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현실은 통계로 드러난다. 국토안전관리원에 따르면 지난해 사망 사고가 난 공공공사 현장 95곳 중 74곳(78%)이 낙찰률 90% 미만의 저가 낙찰 공사 현장이었다. 공사비를 지나치게 낮추면 결국 어디선가 무리해 아끼게 된다. 보통은 안전이 희생양이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싸게 계약하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다. 값이 비싸면 감사 대상이 되지만, 사고는 운 좋으면 피할 수 있고 설사 나더라도 건설사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대통령은 취임 두 달 만에 공식 발언으로만 산업재해 문제를 9차례 거론했다. “정부 차원에서 제재할 수 있는 방안을 모두 찾아 보고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산재 근절에 “직을 걸겠다”고 말했다. 여당은 징벌적 손해배상 등이 담긴 법안을 준비하며 초강경 대응에 나섰다. 대통령이 세게 나서야 기업이 움직이고 제도가 바뀌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 정도 강한 메시지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좋은 취지만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차분히 논의하고 제도 설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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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을 강화하겠다는 건 그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사회 전체가 기준을 지키기 위해 돈을 더 쓰고, 시간을 더 들이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하고 그에 기초한 제도 개선이 있어야 한다. 안전은 ‘전광석화처럼 추석 전 완수’ 같은 구호로 해결 가능한 게 아니다. 대통령 임기 5년간 차분히 논의하고 제도를 설계해 산재 문제만 제대로 해결해도 국민의 박수를 받기 아깝지 않다.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