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청진조선소에서 진수식 도중 쓰러진 구축함 위성사진. 북한은 이례적으로 이튿날 사고 소식을 보도했다. 위성 감시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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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에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 줴기밥(주먹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다. 나는 고난의 행군 전 기간 장군님(김정일)을 모시고 인민과 함께 있었고 인민들이 겪는 고생을 함께 겪었다. 훗날 역사가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은은 어떻게 지냈는가 하고 물으면 나는 그들에게 떳떳이 말해줄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나는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나는 인민들과 같이 어렵게 살았다.”
고난의 행군 시기는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1990년대 중반을 말한다. 만약 이때 김정은이 정말로 스위스가 아닌 북한에 있었다면 지난달 21일 발생한 구축함 진수 사고의 책임을 물어 홍길호 청진조선소 지배인을 체포하기 전에 상부터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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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김정은 지시에 청진조선소에선 5000t급 구축함을 만들어 냈다. 진수할 때 모로 넘어지긴 했지만, 껍데기라도 그럴싸하게 만들어 진수대에 올려놓은 것은 청진조선소의 실제 건조 능력으로 볼 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돈을 들여 대형 드라이독을 만들어 준 남포조선소는 이번에 5000t급 구축함 진수에 성공했지만 청진조선소에는 드라이독이 없었다. 이 차이 때문에 남포조선소 지배인은 영웅이 됐겠지만, 청진조선소 지배인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자가 됐다.
같은 규격 군함을 두 조선소에서 동시에 만들게 한 것은 삼척동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무지의 결정이다. 초도함을 먼저 만들어 띄워 문제점을 찾고 이를 반영해 두 번째 군함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또, 이미 군함을 만든 곳에서 다시 만든다면 훨씬 쉽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은 조급증에 사로잡혔는지 이런 상식을 뒤집고 대형 군함 건조 경험이 전혀 없는 남포와 청진 두 곳에서 동시에 구축함을 만들게 했다. 그러니 청진조선소 사고의 우선적 책임은 김정은이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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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구축함 전도(轉倒) 사고는 배급도, 월급도, 인센티브도 없는 북한 현실이 만든 대표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설령 구축함이 제대로 진수됐다고 해도 이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배급이라도 제대로 해 줬을지 의문이다.
조선소와 함께 국가과학원 역학연구소, 김책공업종합대학, 중앙선박설계연구소 등의 과학자 집단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 집단이 됐다. 이들은 군함의 안전성이나 진수 계산을 담당했을 것이다.
졸지에 처벌받게 될 과학자 중에 고위 간부 자식은 당연히 없다. 사무실에 앉아 계산하고 설계도를 그리는 일은 북한에서 매우 인기 없는 직종이다. 이런 일을 해 본들 먹고살기 어렵다. 직업 특성상 연구원들은 대학을 졸업했겠지만, 정말 힘없는 집안 자식일 확률이 높다. 조선시대 양반이라 할 만한 고위 간부는 자식을 이런 곳에 보내지도 않는다. 이런 직업은 중인 신분에 불과하다. 똑똑한 사람들은 대학 졸업 후 연구소에 발령 받더라도 어떡하든 빠져나와 간부가 되거나 외화벌이 기관에 들어간다. 연구소에 남으면 ‘실패한 인생’일 뿐이다. 그러니 열심히 일할 동기도 없다.
김정은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딸을 데리고 다니며 화를 버럭버럭 내기 전에 북한 현실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매일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워보길 바란다. 그러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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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