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 2막]동장으로 퇴직한 31년 공무원 박성택 씨 늘 현장바닥 지킨 ‘늘공’ 평생 ‘시민의 공복’ 꿈 꿔 귀향 뒤 초고령 마을에 활기 전해 “백성의 기록, 소중한 우리 역사”
‘회향실’이라 이름 붙인 전남 무안 그의 집. 빈 농가를 2000만 원에 사서 고쳤다. 서까래와 기둥만 남기고 벽을 털어내 건평 22평에 거실과 주방, 외양간을 개조한 방과 욕실 2개를 넣었다. 그는 필요한 사람은 와서 자라고 문도 잠그지 않고 다닌다고. 무안=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퇴직 일주일 전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독지가가 기부한 쌀 20kg 포대를 지고 갔다. 다행히 출입문 한쪽에 ‘애국지사의 집’ 명패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 시간을 더 할애해 이야기를 많이 들어드리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담당 통장에게 오며가며 잘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수고했어, 박 동장’에서)
‘동장 박성택’(64). 2019년 말 31년간의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 최종 직함은 중랑구 망우본동 동장. 망우동은 1988년 그가 9급 새내기 공무원 시절 처음 배치됐던 곳이다.
퇴직을 딱 1년 앞두고 5급 사무관으로 승진한 그는, 자신의 원점인 이 자리를 고집스레 자원했다.
출세한 공무원들의 이야기는 넘쳐 나지만 평생 말단을 지킨 공무원 이야기는 드물다. 여기에 숨가쁘게 바뀌어온 30년 간의 시대배경이 어우러져 묵묵히 시민의 삶을 지켜온 공직자의 깨알같은 기록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가 퇴직후 어떻게 지낼지 궁금해졌다. 출판사를 통해 연락처를 얻고 지난달 31일 그가 귀향한 전남 무안으로 향했다.
2019년 중랑구 망우본동 동장을 끝으로 퇴직할 당시 직원들이 열어준 송별회에서.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성택 당시 동장. 박성택 씨 제공
“도시로 간 이곳 사람들도 조상 묘가 있으니 벌초하러 오잖아요. 그런 분들이 자고 가면 좋잖아요. 고향에 와도 아는 사람도 없고 모텔에서 자고 가니 서글프더라는 얘길 들었거든요. 집이 작지만 집들이할 때는 동네분들 23명이 밥 먹었어요. 베개도 10개 정도 있어요.”
“일가 친척은 모두 떠났지만 선산이 여기 있고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도 계시고 친구들도 남아 있어요. 친구들과는 자주 여기서 술 한잔씩 합니다.”
―농사도 지으세요?
“짓고 싶었는데 제가 체력이 안 되더라구요. 좀 무리 했더니 여기저기 아파서. 선산에 나무나 좀 심고 가꾸는 정도예요. 농사 짓는 친구들은 단련이 돼서 어깨를 만져보면 돌덩이 같아요.”
1988년 5월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임용돼 망우2동사무소에 배치됐다. 일터를 배경으로 한 컷. 본인 주장으로는 당시 상당한 ‘패셔니스타’였다고. 박성택 씨 제공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당시 주소지인 관악경찰서로 배치됐는데 사복경찰팀으로 차출돼 대학가에 투입됐어요. 두달 만에 ‘이건 못하겠다’고 사표를 썼지요. 그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서울시 시험을 보게 됐죠.”
1988년 5월 처음 배치된 곳이 서울의 동쪽 변방인 중랑구 망우2동 사무소다.
―서울시 공무원은 구청과 동사무소를 오가며 정말 여러가지 일을 하시더군요. 88올림픽 직전에는 밤마다 거리에 나가 페인트칠도 하시고.
“행정직들은 그래요. 올림픽 직전에는 거리 환경미화 때문에 야밤에 페인트공이 되어 돌아다녔죠. 야식 먹고 길에 널브러져 앉아 쉬는데, 노숙자처럼 보였는지 지나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너 공부 안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고 하더군요. 하하.”
그의 민원처리 제1원칙은 ‘명확한 규정이 없는 한, 이해관계자가 없는 한, 어려운 자에게 유리하게 적용한다’는 것. 홧김에 사표를 던지기도 하고 민원인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하는 등 해프닝이 끊이지 않았다. 약자 편에 서다보니 출세와는 거리가 있었던 듯하다.
“이건 좀 귀한 상이예요.” 공무원 시절 받은 ‘자랑스러운 공무원상’ 상패를 들고. 1998년 6월이면 중랑구 홍보담당관 시절이었을 거라고. 그는 구청에서도 여러 자리를 거쳤지만 홍보일을 할 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회고한다. 무안=서영아 기자 sya@donga.com
“6급에서 8년인가 멈춰 있었죠. 그런데 지자체 공무원 승진은 운도 많이 작용하고 정치 바람도 많이 타요. 구청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
―정년퇴직 딱 1년 전 5급으로 승진했는데 늦었다는 아쉬움은 없으세요?
“전혀. 그래도 1년 했으니까요. 친한 구의원들은 제가 동장할 때 ‘자넨 동장 일을 즐기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더 있었으면 조금 더 많이 일할 수 있었으려나. 중랑구에는 다문화 가정이 많거든요. 제가 다문화자녀들의 합창단을 만들었는데 계속 키워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엄마들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었는데.”
―혹시 공무원 선택한 거 후회는?
“제가 그때 인문계 고졸 출신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공무원이 되어 끝까지 한 것, 최선의 선택이었고 운도 좋았다고 봐요. 이 나이 되니 친구들도 다 부러워해요.”
―책을 쓴 이유는.
“제가 보고겪은 것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수다. 이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사란 기록인데, 역사서들을 보면 군주의 기록만 잔뜩 있지 백성의 것은 없어요. 한국에도 높은 사람이나 정치가들의 기록은 있지만 저같은 말단 공무원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시대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없죠. 이 모두가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니 뭔가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죠.“
지난 30년간 공무원 사회도 확 바뀌었다.
“주민등록 전산화, 지방자치시대 개막, 호주제 폐지, 복식부기 도입 등 공무원 사회가 달라진 몇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복식부기로 수입과 지출을 한눈에 동시에 알아보게 되니 투명성이 확보됐습니다. 제도를 보완하면 어느 정도 부패를 막을 수 있더군요.”
퇴직한 뒤 ‘퍼블릭서반트의 꿈’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는 책을 펴냈다. 그 뒤 이를 개정하고 포장을 바꿔 ‘수고했어, 박 동장’이란 제하에 다시 한번 펴냈다. 무안=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회향실 거실의 한공간. 1944년 상량했다는 서까래를 살린 공간은 좁지만 아기자기하다. 무안=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무안군 관광과에서 알아야 하는데, 저 때문에 이곳을 찾는사람들이 늘었다는걸 말이죠. 하하. 얼마 전 경찰 시절 동기 몇명도 월출산 등산하고 하룻밤 자고 갔어요. ‘숙박시설이 아니라 벗의 집에서 편안하게 하룻밤 보내니 무척 좋았다’고 하더군요. 밤에 마당에서 장작불 피워 ‘불멍’ 타임 해주고 고구마 구워주고 싱싱한 산낙지 안주 대령해주고….“
농촌 인심에 푹 빠져 지내기도 한다.
“뭘 갖다주는 분이 많아요. 쌀은 작년에 네 가마니 들어왔는데 다 소비됐어요. 김장김치는 열두 집에서 두어포기씩 가져다 주셔서, 그 김치들 보관하느라 결국 김치냉장고를 샀어요. 할매들은 고추장 된장 참기름 같은 걸 갖다주시며 신신당부해요. ‘내가 줬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어.’”
고향 생활은 현지 노인들과 어울리는 생활에 가깝다. 집근처 마을회관에는 늘 할머니 7~8 분씩은 계신다.
“사람이 귀하니까 누구라도 오면 반가워하시죠. 저는 딸이나 손자가 내려오면 우선 데리고 가서 할머니들한테 인사부터 시켜요. 우리 손자가 지금 30개월인데, 마을회관에 데려가면 난리가 나요. 다행히 손자놈이 낯을 안 가려서 더 귀염을 독차지하죠.”
고향집에 머물 때면 밤에 마루등을 켜놓는다. 동네 노인들은 그것만으로도 반긴다.
“이분들 주인이 죽은 빈집에는 귀신들이 달려들어서 산다고 믿으세요. 그래서 무섭다고. 제가 들어와서 왁자지껄 사람 소리가 나니까 그것만으로도 무척 좋아하세요.”
자신이 집에 머물고 있다는 표시로 저녁이면 마루 밖 작은 불을 늘 켜놓는다. 사람이 귀한 마을이다보니 이렇게 켜놓은 등불이 지나다니는 이웃들에게 큰 길잡이이자 위안이 된다고. 무안=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동네에 초고령자가 15분 계신데 할아버지는 딱 한분이세요. 할머니는 96세가 최고령인데 그 밑으로 80대 ‘아짐’들이 여러 명 계세요. 더 젊은 층은 노인회관에 나오시니까 걱정을 덜 해도 되고요.”
―남성이 장수를 못해서 그런 건가요.
동네 연장자들에겐 주 1회 꼴로는 문안차 찾아다닌다. 동창 아버지이기도 한 94세 어르신(맨 왼쪽). 마을에 남은 고령 남성이 혼자여서 사람이 오면 반가워하신다. 박씨는 이런 분들에게서 오래 전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억을 더듬는다. 박성택 씨 제공
알고보니 그가 어르신들을 섬기는 이유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고 한다.
“아버지는 1977년에 59세로, 어머니는 1984년에 64세로 돌아가셨어요. 이 분들은 제 부모님과 형님 동생 하면서 살았던 양반들이죠. 부모님 흔적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세요?
마을 최고령인 96세 어르신과. 혼자 씩씩하게 생활한다. 박씨가 설 연휴를 가족들과 경기도 양주에서 쇠고 돌아왔다고 인사차 들렀다. 이분들에게서 마을의 옛날 얘기를 듣고 채록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박성택 씨 제공
동네 80대 할머니 한 분은 제가 돌아온 뒤 아들에게 우리 어머니가 장터에서 국수 사준 기억을 얘기하시더래요. 아이 낳고 얼마 뒤 밥도 굶은채 읍내까지 5km를 걸어서 장에 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산모가 허기진 상태인 걸 알아차린 거죠.
그 국수 얻어먹은 걸 잊지 못하고 계셨다가 아들한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지금은 그 할머니가 매년 복지센터에 쌀도 몇 가마씩 몰래 갖다주고 그러시더라구요.
이런 노인들이 다 돌아가시면 이제 부모님 흔적은 직접 들을 수가 없게 돼요.”
그래서 마을 주민들의 밴드(폐쇄형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만들었다. 도시에 나간 사람까지 현재 115명이 들어와 있다. 고령의 노인들은 밴드 사용이 어렵다보니 그가 동네 소식을 올린다. ‘지금 ㅇㅇ아짐이 벼 베고 계시다’며 사진과 함께 올리는 식이다.
“자기 어머니 추레한 모습 왜 올리냐며 항의하는 애들도 있습니다. 전 사진 찍어서 올리는 것도 기록이고 우리들이 살았던 흔적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다 역사인 거죠. 지금은 이해를 못 해도 나중에 자기 어머니 안 계시게 됐을 때 흔적도 기록도 없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백성들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명백하게 이 시대를 살았고 그런 스토리들이 있는데 왜 지워져야 하나요.”
공무원 4년차 때, 묵 제1동사무소에서 근무했다. 당시 동사무소 근무는 ‘똥직원’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하찮게 여겨지기도 했다고. 박성택 씨 제공
―앞으로 무안에서 하고 싶은 일은.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갈 겁니다. 보고 싶은 사람 보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리고 날 풀리면 지난해 했던 마을문화자원 조사를 이어갈 거예요.”
지난해부터 무안문화원 회원이 되어 마을문화자원 조사 작업을 벌이고 있다. 노인들만 남은 고향, 소멸위기에 빠진 고향에서 지역 역사와 문화를 조사한다. 특히 노인들이 간직한 기억들을 오롯이 살려내 기록을 남기는 게 목표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는 구절을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
마당 한구석 장독대 자리에 그간 받은 감사패들이 애매하게 놓여 있다. 버리기도 뭐하고 장식할 정도도 안되는 것들이라던 그는, “이렇게 비바람 맞다 보면 자연스레 소멸되지 않겠느냐”고 얼버무렸다. 무안=서영아 기자 sya@donga.com
그의 기쁨의 원천인 외동딸 명재 씨의 박사학위 졸업식에서. 딸이 박사공부를 하던 비슷한 시기, 50대이던 아버지는 방송통신대에서 학사를, 시립대에서 석사를 받았다. 박성택 씨 제공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