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법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 탄식 나오도록 휘황한 곳에선… 논리 떠나 흠뻑 받아들이게 돼 압도적 외양-고요함 주는 내부… 고딕 성당의 세속 초월하는 美 쿠데타 충동 인다면 거울 보라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의 모습. 인근 롬바르디아 평원을 뚫고 나온 듯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하늘을 향해 고딕 양식 특유의 첨탑을 뻗어 올리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공식 홈페이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처럼 무엇인가를 흠뻑 받아들이는 일은, 그것을 믿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넘어선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흠뻑 받아들이는가? 인간은 까탈스럽다. 아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인가 진짜 흠뻑 받아들였을 때는, 받아들인다는 말조차 부적절하다. 어느 순간 그것을 ‘이미’ 받아들인 자신을 발견하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낫겠다. 어떻게 하여 무엇인가 받아들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가? 태어난 순간부터 마치 공기처럼 자신의 주변에 있어 왔다면 그것을 그저 받아들이게 된다. 물고기에게 물이 그렇듯이, 아이에게 모태 신앙이 그렇듯이. 자신의 결핍에 딱 부응하는 대상을 마주하게 되어도, 너무나 매력적인 대상을 마주하게 되어도 그것을 흠뻑 받아들이게 된다. 대상의 매력에 감전되는 것이다. 그것의 아름다움에 의해, 신성함에 의해, 찬란함에 의해 휘청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을 것 같은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 어디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곳, 무엇인가 압도적인 곳, 탄식이 나오도록 휘황한 곳, 자신보다 높고 자신보다 깊은 곳, 그런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고딕 성당은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설계된 장소다. 오늘날 유럽에 남아 있는 고딕 성당은 고층 건물들과 함께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고딕 성당의 위용을 느끼려면 주변의 고층 건물들을 소거해야 한다. 그래야 대성당과 주변 환경과의 현격한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작은 것들 사이에 마치 미친 폭포수가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는 대성당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경외심을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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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관부터 하얗게 번쩍이며 사람들을 압도하는 밀라노 대성당을 보라. 정말 무엇인가 대단한 게 그 안에 숨쉬고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일본의 에세이스트 스가 아스코는 밀라노 대성당은 의외로 그에 값하는 실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왼쪽 사진)과 샤르트르 대성당(오른쪽 사진)은 화려한 외연을 가뿐히 감당할 수 있는 장엄함과 숭고함까지 내부에 갖췄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공식 홈페이지
한갓 범부에 불과한 당신도 큰 권력을 쥐면, 법이나 규범을 초월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나약한 인간이니까 망상을 품을 수 있다. 쿠데타를 일으켜 일상적인 법의 외부에 서고 싶을 수 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법 위에 있는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 있다. 남들의 우위에 서고 싶은데 기존 법과 규범을 지켜서는 그 우위를 점할 수 없을 때, 그런 충동이 고개를 들 수 있다. 법을 넘어선 존재가 되어 자기 위주의 법을 선포하고 싶은 충동이 들 수 있다. 증세가 심해지면, 감히 쿠데타를 꿈꿀 수 있다.
민주공화정에서 감히 쿠데타를 꿈꾸어서는 안 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충동이 느껴진다면, 거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거울을 보기 바란다. 다리를 쩍 벌리고 앉지는 않는지, 평소에 세수는 잘하는지, 얼굴에 피지는 없는지, 귀 뒤편까지 비누로 싹싹 닦았는지, 옷매무새는 단정한지, 눈빛은 탁하지 않은지, 목소리는 적당히 저음인지, 저음에 걸맞은 태도가 장착되어 있는지, 그 목소리와 태도에 적절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지, 타인에 대한 연민과 무관심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초연하고도 슬픈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안광이 그윽하게 촉촉한지, 피부는 충분히 곱고 투명한지, 쇄골은 애타는 듯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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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