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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유대계 ‘큰손’ 압박에… 하버드대 총장 결국 사임

입력 | 2024-01-04 03:00:00

개교 388년만의 첫 흑인 여성 총장
학내 反유대 미온적 대처 논란
유펜 총장 이어 2번째… MIT도 타깃



지난해 12월 미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한 클로딘 게이 당시 하버드대 총장(왼쪽)과 엘리자베스 매길 당시 펜실베이니아대 총장. 이때 학내 반(反)유대주의 논란에 모호한 답변을 내놔 유대계 기부자의 비판에 휩싸인 두 사람이 모두 사퇴했다. 워싱턴=AP 뉴시스


반(反)유대주의와 논문 표절 논란 등으로 유대계 기부자를 중심으로 사임 압박을 받았던 미국 하버드대 최초의 흑인 여성 총장 클로딘 게이(54)가 2일 사퇴했다. 지난해 7월 취임 후 불과 6개월 만이며 1636년 하버드대 개교 후 최단기 총장의 불명예를 안았다. 하버드대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를 비판했던 백인 남성 앨런 가버 교무처장(69·사진)을 임시 총장으로 임명했다.

게이 전 총장의 사퇴를 둘러싼 후폭풍도 상당하다. 하버드 내 진보 성향 학자, 비(非)백인계 유명 인사들은 사퇴에 반발하고 있으나 유대계 인사들은 즉각 환영했다. 게이 전 총장과 비슷한 논란에 처한 샐리 콘블루스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의 거취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반유대주의, 표현의 자유, 학내 자율성, 인종·성별 등을 둘러싼 미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대립이 일종의 ‘문화전쟁’을 넘어 11월 대선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거론된다.

● 청문회 약 한 달 만에 사퇴

게이 전 총장은 2일 학내 구성원에게 서한을 보내 “저의 사임이 하버드에 최선의 이익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밝혔다. 인종적 적대감에서 비롯된 개인적 공격과 위협이 두려웠다고도 했다.

하버드대는 가버 교무처장을 임시 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하마스 테러에 대한 하버드대의 비판 수위가 높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하버드대 경제학사, 스탠퍼드대 의학박사 출신이며 2018년에도 총장 후보로 거론됐다.

게이 전 총장은 지난해 12월 5일 엘리자베스 매길 전 펜실베이니아대(유펜) 총장, 콘블루스 MIT 총장과 함께 미 하원 교육노동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당시 세 사람은 “중동 전쟁 발발 후 ‘유대인을 죽이자’고 공공연히 외치는 일부 학생이 대학의 윤리 규범을 위반했느냐”는 엘리스 스터파닉 공화당 의원 등의 질문에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모호한 답변을 해 유대계와 보수층의 반발을 불렀다. 당시 게이 전 총장은 “하버드대는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한다”고 했다.

유대계 헤지펀드 ‘큰손’이자 하버드대 동문인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 등은 세 사람에 대한 퇴진 운동을 시작했다. 이에 가장 먼저 매길 전 총장이 청문회 나흘 만에 자진 사퇴했다. 게이 전 총장의 퇴진 요구 또한 거셌지만 이사회가 재신임해 잠시 위기를 넘기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박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까지 추가로 제기되자 버티지 못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고액 후원자의 퇴진 요구가 계속되고 지난해 11월 한국의 수시 전형에 해당하는 ‘조기 전형’ 지원자가 한 해 전보다 17% 감소해 4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자 게이 전 총장을 지지했던 이사회도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하버드대는 지난해 미 대학 중 최대 규모인 507억 달러(약 66조5000억 원)의 기부금을 거뒀다. 대학 재정에서 기부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어서 총장 직위 또한 기부금 액수와 직결된다.

● MIT 여성 총장도 위기
유대계 인사들은 이참에 콘블루스 총장까지 몰아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애크먼 회장은 게이 전 총장의 퇴진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샐리 (콘블루스) 너마저(Et tu Sally)?”라며 MIT를 압박했다. 스터파닉 의원 또한 “두 명이 나가떨어졌고 한 명이 남았다”고 했다.

반면 흑인 인권운동가 앨 샤프턴 목사는 “모든 흑인 여성에 대한 공격”이라며 4일 뉴욕의 애크먼 회장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역시 흑인 남성인 칼릴 지브란 무함마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 역시 “대학의 독립성에 전쟁을 선포한 끔찍한 순간”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등 공화당 대선주자는 대학 내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교육 과정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11월 대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