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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유영]오프라인은 죽지 않았다

입력 | 2023-12-10 23:45:00

‘팝업스토어 성지’로 사람 몰리는 성수
특색 살린 브랜딩으로 도시 경쟁력 높여



김유영 산업2부장


올해 10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일대 건물들이 보라색 천으로 뒤덮인 적이 있었다. 영국 브랜드 버버리가 성수동에서 메인 스트리트로 꼽히는 연무장길 일대 3곳에 각각 다른 팝업스토어를 동시에 열고, 인근 건물까지도 보라색 천을 덮어놨다. 버버리를 상징하는 ‘잉글리시 로즈’ 문양이 들어간 천을 씌워서 연무장길 일대를 버버리 거리로 만든 것.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까지 1시간은 족히 넘는데도 사람들은 줄 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온라인 팝업창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다 해서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두 달 운영되는 팝업스토어가 성수동에선 한 달에 200개씩 열린다. 성수동 자체가 ‘거대한 쇼룸’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 쇼핑 침투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성수동에서 어떻게 자사 브랜드를 알릴지 고민하는 마케팅 담당자들이 적지 않다. 럭셔리뿐 아니라 신진 K패션 브랜드, 일명 K컨템(K-Contemporary)부터 생활용품 게임 식품 주류 금융 가전 등 업종을 막론하고 비슷한 고민을 한다.

이는 오프라인만의 물성(物性)을 무시하지 못한 데에 따른 것이다. 직접 만져보고 입어보고 맡아보는 등의 체험은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쿠팡과 마켓컬리마저도 온라인 쇼핑 플랫폼임에도 성수동에서 각각 ‘메가뷰티쇼’(화장품)와 ‘오프컬리’(식재료)라는 팝업스토어를 열었고, 무신사는 아예 성수동에서 건물들을 사들인 ‘부동산 큰손’이 되어 본사를 옮기고 일부 건물에선 자사 제품을 선보인다. 채용 홍보도 온라인이 일반화됐다지만 현대자동차는 ‘채용 팝업’을 열고 취업 준비생들을 직접 만난다.

성수동이 왜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인기일까. 도시계획 전문가들 사이에서 성수동은 ‘서울스러움’, 특히 ‘성수스러움’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경우로 꼽힌다. 성수동은 서울 유일의 준공업지역으로 1960년대 염색·도금 공장, 1970년대 가발 공장, 1980년대 봉제 공장을 거쳐 이후 수제화 공방과 인쇄업체들이 들어섰지만 2000년대 퇴락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도심 공동화가 빚어졌을 이곳을 파고든 것은 간간이 생기는 카페들이었다. 도심 접근성이 좋은 데다 임대료가 비교적 쌌다.

그러다 2015년, 정미소로 쓰였던 낡은 창고인 대림창고에서 샤넬이 패션쇼를 열며 기업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의외의 장소’에서 열린 소위 힙한 행사에 셀럽들이 열광했고 송지오나 앤디앤뎁 슈콤마보니 등 1세대 K컨템 브랜드들이 들어왔다. 여기에 성동구는 프랜차이즈 입점을 일부 제한하고, 기존의 ‘붉은 벽돌’ 건물엔 건축비를 지원하는 등 급속한 상업화에 제동을 걸었다. 물론 성수동도 임대료가 치솟았고 3.3㎡당 토지 매매가는 1억 원을 돌파해 2억 원에 근접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대기업 본사들이 이전하고 과거 아파트형 공장이었던 지식산업센터에 스타트업들이 들어차면서 성수동은 주 7일 내내 활기가 이어지며 ‘지역 노화’가 비교적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요새 온라인이 사방을 휩쓸고 있다지만, 오프라인 플랫폼이 주는 진귀하고 희귀한 매력은 온라인이 대체할 수 없다. 저마다의 특색을 강조하고 싶은 기업들이 고객들에게 소구하고 싶은 이미지와도 일치할 것이다. 성수동은 지역을 과거와 현재의 접점이 맞닿은 공간으로 재해석해 도시 매력을 높인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기업이건 지역이건 결국은 오랜 기간 쌓아온 자기만의 정체성(identity)과 그 본질(essence)에 대한 고민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걸, 21세기 새로운 오프라인 플랫폼이 된 성수동이 보여준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