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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국정원 인사 파동’, 원인과 해법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입력 | 2023-11-13 11:00:00

[10] 정보실패의 역사 下




최근 국가정보원에서 인사 파동이 다시 불거지면서 김규현 원장과 1, 2차장 등 지휘부를 전격 경질했습니다. 정권 교체 이후 국정원 간부들을 대거 갈아치우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난 데 따른 겁니다. 업무 속성상 인사, 예산 등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야 하는 정보기관에서 인사 잡음이 외부로 알려진 건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 원인을 짚은 9회(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1029/121922976/1)에 이어 이번에는 국내외 정보 실패 사례를 통해 정보기관 개혁 방향을 다뤄보겠습니다(크리스토퍼 앤드루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저서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국정원의 ‘대북(對北) 정보 실패’ 사례

올 2월 국가정보원 청사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뒷벽에 붙은 별 표시는 임무 수행 중 순직한 정보요원들을 기리는 ‘이름 없는 별’이다. 대통령실 제공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사건은 국정원의 대표적인 정보 실패 사례로 꼽힙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원세훈 원장이 이끌던 국정원은 김정일이 사망하고 이틀이 넘도록 이를 알지 못하다 북측의 보도 이후에야 파악했습니다. 물론 CIA 등 서방 주요 정보기관들도 김정일 사망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갖지 못한 고급 휴민트(인간 정보 자산)를 보유했다는 국정원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파가 컸습니다.

스탈린주의식 유일 지배체제 국가인 북한에서 수령의 일거수 일투족은 가장 중요한 정보 가치를 지닙니다. 예컨대 북한은 2018년 북미 정상회담 때 수령의 신체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김정은 전용의 이동식 변기까지 싱가포르에 공수해갔죠.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통제국가에서 수령의 신상 정보를 얻는 건 지극히 어렵습니다. 설사 평양에 외교공관을 둔 국가라도 이중, 삼중의 감시구조가 작동하는 북한 현지에서 협조자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죠.

이런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권력 핵심에 딥스로트를 갖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당시 국정원(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은 휴민트를 동원해 이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17년 후에는 왜 수령의 사망 사실을 적시에 포착하지 못했을까요. 이를 두고 이명박 정부 직후 국정원 개편 과정에서 대북전략국을 해체하면서 대북 정보망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역대 정부서 반복된 ‘정보기관의 정치화’
전문가들은 정권 교체 시기마다 국정원(이전 안기부)의 인적 청산이 대규모로 이뤄져 전문성이 떨어지는 폐해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담당하며 쌓아놓은 정보망(인적 네트워크)이 대규모 조직개편 과정에서 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북전략국이 해체돼 대북 정보망이 흔들린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3개월 뒤인 1998년 5월 국가정보원으로 개칭되기 직전 국가안전기획부 청사를 방문해 원훈석 제막식을 갖고 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은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원훈으로 바뀌게 된다. 동아일보DB

윤석열 정부는 신임 국정원장이 임명되기도 전인 지난해 5월 11일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박지원 원장을 해임하고, 그 다음달 1급 보직국장 27명 전원을 대기 발령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선 국정원에 ‘적폐청산 TF’를 설치하고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기는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나섰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 명칭을 국정원으로 바꾸고 전체 직원의 약 11%를 구조조정했고, 김영삼 정부에선 안기부 직원 약 300명을 대기 발령했습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직접 겸임하면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해 약 300명의 요원들을 내보냈습니다.

역대 정부들에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건 국정원을 정권의 친위기관으로 여겨 ‘내 사람’을 심어야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9회에서도 다룬 ‘정보기관의 정치화’ 문제입니다. 정책 결정자가 정보기관을 길들이려는 정보기관의 정치화는 정보 실패로 이어집니다. 정보기관이 인사, 예산권을 틀어쥔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정세를 왜곡하기 때문이죠.

사실 이는 비단 한국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최근 하마스 기습을 예측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정보 실패를 네타냐후 총리의 극우 행보에서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가 사법부를 무력화하는 비민주적 정책을 강행하면서 여기에 반대한 군부 및 정보기관을 적대시하고 불신한 게 정보 실패로 이어졌다는 거죠.

냉전이 한창 벌어지던 1950, 60년대 서구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케임브리지 파이브(Cambridge Five)’ 사건도 권력자의 왜곡된 시각이 정보 실패를 촉진한 사례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영국 정보기관에서 활동한 킴 필비, 도널드 매클레인, 가이 버지스 등 5인은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자진해서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일종의 이중 스파이였습니다. 이들은 서방의 고급 정보를 대거 전달했지만, 소련의 최고지도자 스탈린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죠. 이들은 본질적으로 영국의 스파이라는 스탈린의 섣부른 판단으로 인해 케임브리지 파이브가 제공한 일급정보 상당수가 사장돼 버립니다.


오판 줄이기 위한 견제 필요성
정보 실패는 기본적으로 적의 의도와 능력에 대한 오인(misperception)에서 비롯됩니다. 최근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하마스의 평화공세에 속아 이들의 적대적 의도를 직시하지 못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사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상이한 정보보고들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시계를 제2차 세계대전 때로 돌려보죠. 1933년 집권 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재무장에 박차를 가한 히틀러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에 이어 그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영국에선 대응 방향을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히틀러와 적당히 타협하자는 주장과 더 이상의 침략을 저지하려면 무력개입까지 불사해야한다는 주장이 맞섰죠.

反나치주의자였던 독일 외교관 볼프강 추 푸틀리츠. 위키피디아

이때 영국 국내정보국(MI5)은 독일 내 핵심 정보원의 보고를 토대로 히틀러에 대한 강경 노선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이 정보원의 이름은 나치에 반대한 독일 외교관 볼프강 추 푸틀리츠였습니다. 독일 내부 정세에 밝았던 그는 유화책은 히틀러를 공격적으로 만들 뿐이며, 그를 막는 유일한 길은 강경 노선이라고 확언했습니다. 1938년 푸틀리츠는 MI5에 “영국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면 히틀러의 엄포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독일군은 아직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독일군은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도 차량 고장으로 진군이 지연될 정도로 전쟁 준비에 빈틈이 많은 상태였죠. 그러나 이후 체코를 병합하며 전쟁물자를 추가로 확보한 뒤 전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전쟁사가들은 독일의 체코 침공 당시 영국이 프랑스 등과 연합해 히틀러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경론을 고수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해외 정보를 책임진 영국 비밀정보부(MI6)의 보고는 MI5와 달랐습니다. MI6는 체코가 독일어권인 주테텐 지방을 독일에 내주면 히틀러의 폭주가 멈출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MI6의 예상과 반대였죠. 결국 MI5의 보고대로 영국 정부의 유화정책에 따른 뮌헨협정은 히틀러의 야욕을 키우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MI6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MI5가 견제구를 날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두 기관의 정보가 적시에 공유, 조정되는 시스템이 당시 갖춰져 있지 않은 게 문제였죠. 정보의 다양한 해석과 기관간 견제를 유도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정보가 공유, 조정되는 시스템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정보기구는 국내와 해외, 대북 정보기능이 국정원 한 곳에 통합돼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국군정보사령부, 국군방첩사령부, 경찰 정보국 등 여타 정보기관들의 업무를 조정하고 예산을 관리하는 기능까지 국정원이 맡고 있죠. 이에 따라 기관간 견제 차원에서 국내 정보와 해외 정보 기능을 분리해야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사실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등을 둔 미국이나 MI5와 MI6를 둔 영국, 연방보안국(FSB)과 대외정보국(SVR)을 둔 러시아, 연방헌법수호청(BFV)과 연방정보원(BND)을 둔 독일 등 주요국들은 국내와 해외 정보기관을 복수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콘트롤타워로 미국 국가정보장실(ODNI)을 신설해 각 정보기관들의 업무를 조정하고 정보를 공유토록 하고 있습니다.


‘정보 공유’ 실패로 패전한 나치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만든 기기 복원품(오른쪽)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포스터(왼쪽). 위키피디아

6.25 전쟁 때로 시계를 잠시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북한의 기습공격에 남한이 허를 찔린 것은 정보 실패에서 비롯됐습니다. 전쟁 전 남한에 파견된 CIA 요원이 불과 2~3명에 불과했던데다 이들의 정보 수집 및 분석 역량이 낮다 보니 정보의 질이 떨어졌다는 게 학계 분석입니다.

게다가 남한에서 미군 철수로 한반도까지 커버해야했던 도쿄 극동군 사령부의 비협조도 한몫했죠. 정보기관의 기능을 무시한 맥아더 사령관이 CIA와의 정보 공유를 차단했기 때문입니다(CIA 본부는 1950년 5월 이후에야 극동군 사령부의 정보에 완전히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군에 대한 CIA의 정보 역량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죠.

정보기관 간 견제와 더불어 통합 조정과 정보 공유가 중요하다는 것은 2차 대전에서도 확인됩니다. 전쟁 초기 독일 유보트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해군은 궤멸적 피해를 입는 최대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런데 이때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 독일군 암호체계(에니그마)를 해독한 데 이어 영국 정부통신본부(GCHQ)를 중심으로 독일군의 시긴트(신호정보)를 통합 수집하면서 판세를 뒤집는데 성공하죠(앨런 튜링의 일대기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2015년)에 실감나게 묘사돼 있습니다) 당시 영미 연합군의 신호정보가 적시에 취합 공유돼 GCHQ가 집중 분석한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한 겁니다.

반면 독일에선 국방군 최고사령부 암호국, 외무부 체트(Z)국, 헤르만 괴링의 조사국, 나치 친위대(SS) 산하 보안국(SD), 육해공군 정보기관들이 각기 신호정보를 수집, 분석하고는 이를 공유하지 않아 시너지를 내지 못합니다. 독일이 GCHQ 중심의 통합 정보체계를 구축하지 않은 건 히틀러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 정보기관들의 충성 경쟁을 유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효율성 대신 권력집중을 선택한 겁니다.

정보 공유의 중요성은 2001년 9.11 테러 때도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미 의회 9.11 진상조사위원회는 최종보고서에서 미국이 정보 통합관리에 실패해 테러를 무산시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2011년 9.11 테러 당시 항공기와 충돌로 불타고 있는 옛 세계무역센터.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은 대대적인 정보기관 개혁에 착수했다. 위키피디아

예컨대 NSA는 2000년 1월 테러 감행 전 항로 답사차 쿠알라룸푸르를 방문한 범인 3명의 통화를 감청해 이들이 수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FBI, CIA 등 관련 정보기관에 이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또 CIA는 2001년 3월 태국 정부로부터 테러범 중 한 명이 LA행 항공기에 탑승했다는 정보를 전달받았지만 이를 FBI와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FBI는 비행훈련을 하던 아랍인을 체포해 추방 조치만 내리고 CIA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죠. 조사위에 따르면 당시 체포된 아랍인의 신상 정보를 CIA의 알카에다 데이터베이스와 연계시켰다면 용의자 심문을 통해 테러 모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종합하면 NSA, CIA, FBI, 국무부, 군 등 관련 정보기관들이 수집한 정보를 제때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의 미비가 9.11 테러를 막지 못한 결정적 요인이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조사위는 정보기관 간 정보공유를 확대하고, 이들을 통제하는 국가정보장실(ODNI) 신설을 제안했습니다. 그 결과 CIA, FBI, NSA 등 16개 정보기관을 통솔 조정하고, 이들의 예산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의 국가정보장실(ODNI)이 생기게 됩니다.

지금까지 각국 정보 실패 사례를 통해 정보기관의 정치화를 막고, 정보 왜곡을 줄이기 위한 기관간 견제(예컨대 해외, 국내 정보의 분리)를 유도하되 취합된 정보를 적시에 공유할 수 있는 조정 시스템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국정원의 인사 파동을 근절하려면 국정원을 최고 권력자의 친위기관으로 여기는 행태에서 벗어나는 등 정보기관의 정치화를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중 갈등으로 야기된 신(新)냉전 와중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잇달아 터지며 대북 안보 위협이 커진 이때 국정원의 역할은 막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정원이 정권교체에 따른 부침(浮沈)에서 벗어나 정보 실패를 예방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야 할 때 아닐까요.


[참고 문헌]
-크리스토퍼 앤드루·박동철 역, 〈스파이 세계사〉 1, 2, 3 (한울·2021년)
-전웅, <9/11 테러, 이라크 전쟁과 정보실패>(세종연구소, 2005년)
-석재왕, <한국전쟁 발발과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정보실패>(국가안보와 전략 63호, 2016년)
-Foreign Policy 〈What Israeli Intelligence Got Wrong About Hamas〉(2023.10.11)
-월간조선 〈흔들리는 국정원 향해 작심한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 “국정원장들이 국정원 다 망쳐 놨다”〉(2014년 8월호)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