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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조종엽]이범석 한국광복군 장군의 미국인 형제 사전트 대위

입력 | 2023-08-18 23:35:00

조종엽 문화부 차장


1953년 6·25전쟁이 끝난 뒤 장년의 한국인이 바다를 건너 미국에 있는 아홉 살 아래 친우의 집을 방문했다. 이 한국인은 미국인 친우의 취향을 고려해 휴대용 금속제 술병을 선물했다. 병엔 각각 자신과 친우를 상징하는 용과 올빼미가 사이좋게 장식됐다. ‘이범석이 미국인 형제에게’라는 글씨도 새겼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1900∼1972)이 구미 각국의 정세를 시찰하러 순방길에 나섰다가 옛 친구인 클라이드 사전트 전 미국 전략사무국(OSS) 비밀첩보과 대위(1909∼1981)를 만나러 왔던 것이다.

독립기념관과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의 연구를 통해 ‘독수리작전’의 미군 측 지휘관 사전트 대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는 원래 중국학을 연구한 학자였다. 중일전쟁 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중국의 대학에서 외국어학과 과장으로 일했다. 중국 전문가가 된 데엔 미국 지질조사국 소속 지형학자로 중국 내륙을 가로질러 여행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OSS가 그를 영입한 것은 1943년경이고, 이듬해 4월 미국 육군 대위로 임명됐다.

이 장군과의 첫 만남은 1944년 10월이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이던 이 장군이 광복군과 미군의 연합작전을 제안하며 OSS를 찾아온 것. 이 장군의 초청으로 사전트 대위는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조선인 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의 사기와 역량, 단결심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OSS의 훈련을 받은 광복군이 한반도에 침투해 정보 수집, 파괴 공작 등을 벌이는 ‘원조 한미동맹’ 독수리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전트 대위는 종전 뒤 중국 북부 지역에서 한국인의 귀환을 도왔고, 미소 공동위원회 고문으로 일하며 한국 정치인과 미국 사이에 교섭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48년 전역했고, 미국으로 돌아가 1981년 7월 27일 숨을 거뒀다. 그는 한국과의 인연에 대해 “일생에 있어 큰 경험이었다”고 했다. 그의 아들 로버트 사전트 씨는 지난해 독립기념관이 주선한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동맹 한국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가족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이 장군과 사전트 대위는 나란히 72세까지 살았고,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각각 회고록을 남겼다. 중미 양국은 모두 일제에 맞선 한국의 항전을 지원했지만 이 장군과 사전트 대위의 회고록을 보면 살짝 느낌이 다르다.

임정은 훙커우공원 의거 이래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지만 때로 발목을 잡히기도 했다. 이 장군의 표현을 빌리면 ‘객군(客軍)’의 설움이 있었다. “중국 당국에선 작은 인사 문제까지 간여했다. 자기네가 누구를 지명해서 중국 사람으로 무슨 참모장을 내겠느니, 처장을 내겠느니 등등 협정 아닌 협정을 제시하며 압력을 가했다. … 그래서 어려운 일들이 자꾸 발생하곤 했다.”(이 장군 회고록 ‘우둥불’에서)

미군과의 합동작전은 달랐다. 사전트 대위는 “이범석과 사전트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조성한 평등, 존중, 협동의 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정신을 지닌 하나의 군단이 힘을 얻었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성격의 문화적 차이가 여기서도 엿보인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