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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보다 태극마크가 어렵다? 교수님 된 ‘신궁’ 기보배의 대답은?[이헌재의 인생홈런]

입력 | 2023-06-18 12:00:00


기보배 ‘교수님’이 서울대 야구장에서 강의를 마친 뒤 과녁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 이헌재 기자 



올해 1월 서울대 수강신청 시스템에는 ‘강의계획서_양궁_기보배.hwp’라는 제목의 문서 파일이 올라왔다. 1학점짜리 교양과목 양궁의 강사가 2012년 런던 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인 기보배(35·광주광역시청)라는 걸 유추할 수 있는 문서였다. 곧바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광클(광속 클릭)’ 전쟁이 벌어졌다. 수강 신청 경쟁률은 10대 1을 훌쩍 뛰어넘었다. 클릭이 빨랐던 60명(오전 9시 30명, 오전 11시 30명)의 학생들만 이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에는 양궁장이 따로 없다. 기보배의 양궁 강의는 서울대 야구장 한쪽의 빈 공간에서 열린다. 이론보다는 실기 위주다.

얼마 전 찾은 서울대 야구장에서는 학생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과녁을 향해 활을 쏘고 있었다. 선수들이 쓰는 활에 비해 장력이 약한 활을 사용해 누구나 쉽게 활시위를 당겼다. 과녁까지의 거리도 20m 남짓했다. 기보배는 이리저리 다니며 선수들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기도 하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기보배는 “서울대의 양궁 강의는 원래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강의를 늘리면서 추가로 강사를 채용했는데 내가 지원을 하게 됐다. 시간강사이지만 학생들로부터 ‘교수님’ 소리를 들으면 굉장히 마음이 설렌다”고 말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장혜진, 최미선, 기보배(왼쪽부터). 동아일보 DB




기보배가 교수님이 되는 건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 오전뿐이다. 기보배는 여전히 현역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결혼해 딸을 낳은 엄마 궁사다. 교수와 선수, 엄마 등 1인 3역을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

광주광역시청 소속 선수인 그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소속팀이 있는 광주에서 동료 선수들과 함께 훈련에 매진한다. 목요일 훈련을 마친 뒤 저녁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금요일 오전에 서울대 학생들을 가르친다. 강의가 끝나면 마침내 기다리던 가족들과 주말을 함께 지낸다. 하지만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월요일 훈련 시간을 맞추기 위해선 일요일에 다시 광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는 올해 ‘소원’ 하나를 성취했다. 3월에 열린 2023년 양궁 국가대표 3차 선발전 리커브 여자부에서 종합순위 8위에 오르며 국가대표 8명 중 마지막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2017년 이후 무려 6년 만의 국가대표 복귀였다.

이후 열린 최종 평가전에서 탈락해 광저우 아시아경기에 출전하는 4명 안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하지만 2차례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딴 기보배에게는 ‘국가대표’ 자체가 큰 영광이자 성취였다. 기보배는 “사실 선수 생활을 올해까지만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은퇴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더 태극마크를 달아보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태극마크를 달아보고 은퇴하는 게 작은 소원이었다. 항저우 아시아경기는 못 가지만 목표로 했던 소원을 이뤄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국가대표가 되면서 4월에 충북 진천선수촌에 입촌하게 되면서 서울대 양궁 강의는 잠시 온라인으로 대체해야 했다. 항저우 아시아경기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으면서 그는 다시 대면 강의를 진행해 왔다.

올해 대표선발전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기보배. 대한양궁협회 제공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을 얘기할 때 흔히 “올림픽 금메달 따는 것보다 국가대표 뽑히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을 하곤 한다. 기보배의 사례를 보면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신궁’이라 불리며 양궁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같은 기보배이지만 그에겐 아쉬움이 남은 게 또 하나 있다. 양궁 그랜드슬램을 놓친 것이다. 양궁 그랜드슬램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아시아경기와 아시아선수권 개인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기보배는 유독 아시아경기와 인연이 없었다. 선수로서 절정의 기량을 발휘하던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대표선발전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올해 항저우 대회도 역시 탈락이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3개나 땄고,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땄지만 아시아경기 개인전 금메달은 딴 적이 없다. 한국 선수로 양궁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박성현 여자 대표팀 감독이 유일하다.

내년 파리 올림픽이 있지만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이유에 대해 기보배는 “한국 양궁 국가대표가 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나라 양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양궁을 제외한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학위수여식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기보배. 조선대 제공



내년부터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기보배는 교육자로서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은사인 김성은 광주여대 감독(현 광주은행 감독)의 권유로 바쁜 선수 생활 와중에도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2월 조선대에서 ‘다중지능이론을 활용한 초등학생 표적도전 양궁 신체활동 프로그램 개발 및 적용’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보배는 “선수 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학위를 받는데 7년이 걸렸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출산도 했다. 또 2021년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올해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기 전 박사 과정을 밟던 조선대에서도 3학기 정도 강의를 했다. 그는 “양궁의 매력은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 점수가 나오는 게 양궁이다. 선수 시절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해 왔듯이 은퇴 후에는 교육자로 양궁의 재미와 즐거움을 더 많이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기보배는 선수 생활을 하는 중에도 해설위원으로도 종종 활동했다.  동아일보 DB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듬해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치열한 환경 속에서도 기보배가 30대 중반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몸 관리에도 충실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볼 때 양궁은 체력소모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하루에 수백 발의 화살을 쏘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동계 훈련 때 지구력과 근력을 충분히 쌓아두지 않으면 한 시즌을 버텨낼 수 없다.

기보배도 러닝과 근육 운동을 꾸준히 한다. 일 주일에 3, 4번은 5km 정도 뛰면서 지구력을 키우고 코어 운동 위주로 근력을 키운다.

기보배를 포함한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가장 애용하는 훈련은 바로 ‘밴드’를 활용한 운동이다. 스트레칭 밴드를 이용해 관절의 가동 범위를 넓히고 근력까지 강화한다. 밴드만 있으면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집이나 숙소에서도 할 수 있다. 기보배는 “양궁은 큰 근육보다는 소근육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밴드 운동은 보여주기 위해 근육보다는 정말 필요한 근육을 키우는 데 좋다. 일반인분들께도 꼭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