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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출신 국대→日구단 부사장→韓축구 행정가…‘캐논 슈터’ 황보관의 남은 꿈은?[이헌재의 인생홈런]

입력 | 2023-06-04 12:00:00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캐논 슛을 터뜨린 뒤 환호하는 황보관. 동아일보 DB

프로축구 경남FC 신인 공격수 유준하(22)는 4월 2일 김천 상무와의 K리그2 경기에 선발 출전해 약 30분간 그라운드를 누볐다. 이날 프로 데뷔전을 가지면서 유준하는 서울대 출신으로는 모처럼 프로축구 무대를 밟은 선수가 됐다. 1988년 황보관, 1989년 양익전, 1991년 이현석 이후 32년 만의 일이었다.


고교 때 축구 선수를 하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공부보단 축구가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고교 때 축구를 꽤 잘했지만 프로 팀들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 1학년 때 서울대 축구부 ‘서울대 네이마르’로 불리던 그는 2학년이던 2021년 테스트를 통해 4부 리그 노원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지난해까지 아마추어 선수로 뛰었다. 그리고 공부와 운동을 병행한 끝에 마침내 경남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대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프로축구 선수는 황보관 대한축구협회 기술본부장(58)이다. 그가 서울대에 입학한 과정은 유준하와는 달랐다.

고향인 대구에서 다니던 고교 축구부가 해체돼 서울체고로 전학을 간 그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당시 여느 축구를 하는 또래들처럼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전학을 와서 본 첫 시험에서 같은 반 60명 중 58등을 했다. 황보 본부장은 “그 때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유해 주셨다. 처음엔 읽기 쉬운 소설로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글과 익숙해 지면서 공부에도 재미를 느끼게 됐다”고 했다.

당시 체고 재학생들은 주말이면 외박을 받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황보 본부장은 갈 곳이 없었고, 숙소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는 “그렇게 1년쯤 하다 보니 10등 안에 들어 있더라. 공부가 잘 되고 인정을 받으니까 운동까지 덩달아 더 재미있어졌다. 그렇게 공부와 운동을 함께 하면서 서울대까지 입학하게 됐다”고 말했다.


50대 후반이 요즘도 여전히 선한 인상의 황보관 본부장. 그는 요즘 커피와 와인에 푹 빠져 있다. 이헌재 기자 

서울대는 예나 지금이나 운동과는 거리가 먼 학교다. 서울대 야구부는 2004년 거둔 1승이 유일한 승리다. 하지만 황보관이 활동할 당시 서울대 축구부는 달랐다. 베스트11 중 특기생도 여럿 됐고, 체계도 잘 갖춰져 약팀이긴 해도 무시할 수는 없는 팀이었다. 신연호, 김종부 등이 뛰던 고려대에 승리하기도 했고 전국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다.

황보 본부장은 대학교 4학년 때 국가대표 2진으로 뽑혀 남미 원정에도 동행했다. 그 대회에서 골을 넣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1988년 프로 팀 유공 코끼리에 입단까지 하게 됐다. 그리고 프로 첫 해 7골-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신인왕에도 뽑혔다. 여세를 몰아 국가대표로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황보 본부장은 “당시 ‘서울대 나온 애가 하면 얼마나 하겠어’라는 시선이 많았다. 내게는 큰 동기부여가 됐다. 훨씬 더 독한 마음으로 뛰고 또 뛰었다”며 “별볼일없던 선수였던 내가 발전하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어, 정말 되네’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의 축구 인생의 클라이막스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다. 스페인과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전반 후반 최순호가 살짝 밀어준 공을 오른발로 강하게 차 상대 골망을 흔들었다. 시속 114km가 나와 당시까지 월드컵에서 기록된 가장 빠른 슈팅이었다. ‘캐논슈터’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즈음이다. 황보 본부장은 “사실 직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그때도 최순호 선배가 밀어준 공을 프리킥 골로 성공시켰다”며 “그 골 이후 정말 많은 게 바뀌었다. 외국 팀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기도 했고, 국내에서도 스타덤에 올랐다”고 했다. 매일 숙소로 팬레터가 수십 통씩 쏟아졌고, 당시 라디오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도 두 번이나 게스트로 출연했다.


집 인근 호수공원 산책 중 한 컷. 황보관 본부장 제공 

1994년 미국 월드컵 출전이 불발된 후 그는 일본 오이타 트리니타로 이적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곳에서 그는 제2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혔다. 1996년과 1997년에 선수로 뛴 뒤 유소년 구단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수석 코치를 거쳐 2005년엔 감독으로 승진했다. 이후엔 프런트로 변신해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2008년 오이타는 나비스코컵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FC서울 감독을 역임했고, 2011년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으로 선임돼 행정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현재 맡고있는 기술본부장은 국가대표 선발과 지원, 지도자 등 인재 육성, 한국 축구 경쟁력 강화 방안 마련 등을 총괄하는 요직이다.

그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경기 일산에서 살고 있다. 협회가 있는 파주 축구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이 위치한 경기 파주를 쉽게 오가기 위해서다.

정신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는 건강관리만큼은 거르지 않는다. 파주에 출근할 때는 출근시간을 한 시간 정도 당겨 한 시간 가량 코어 운동을 중심으로 웨이트 트레이닝과 유산소 운동을 한다. 평소 집에서 쉴 때는 아내와 함께 집 인근 호수공원을 한 시간 내외 걷곤 한다.

한 달에 최고 한 번은 공도 찬다. 6년째 서울대 축구부 OB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동호인 축구라고 해도 몸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며 “서울대 축구부의 끈끈함이 있다. 월례적으로 하는 축구 경기와는 별개로 7월과 11월 등 1년에 두 번은 서울대 축구부 OB와 YB가 함께 하는 자리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현재 체중은 선수 때보다 3kg 정도 많은 70kg대 후반을 유지한다.


자선대회에서 공을 차는 황보관 본부장. 동아일보 DB

스트레스가 심한 승부의 세계에 수십 년째 몸담고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다. 황보 본부장은 “나도 잘 몰랐는데 요즘 딸들이 ‘아빠는 참 긍정적이야’라고 말하더라. 그런 마음이 어디서 왔을지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대신 잘 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고 있더라. 어떤 일이든 발전적인 방향을 생각하고, 그 방안을 찾아내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다. 요즘에 그는 커피와 와인에 빠져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여행을 많이 다니려 한다.


이탈리라 포지타노 여행 중인 황보관 본부장. 황 본부장은 포지타노를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꼽았다. 황보관 본부장 제공 

감독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육성에서 만큼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황보 본부장은 “현직을 끝내고 야인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부모의 마음,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축구의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고 했다.

그가 그리는 또 하나의 미래는 ‘제2의 고향’인 오이타에 집을 하나 장만하는 것이다. 일본의 대표 온천 지역인 오이타는 골프와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오이타 부사장으로 재직할 때 비즈니스를 위해 골프를 많이 쳤다. 지금도 70대와 80대를 오가는 실력”이라며 “오이타에 집을 마련하면 그 동안 신세를 졌던 분들을 초대해 좋은 시간을 갖고 싶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인생을 즐기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미국 하와이 쥬라식 파크를 여행중인 황보관 본부장. 황보관 본부장 제공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