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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소설 중 최고”…한마디만 믿고 해외 출간 계약한 ‘고래’, 부커상 최종 후보로

입력 | 2023-04-23 11:51:00


2016년 5월 영국 런던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 참가한 천명관 작가(오른쪽)과 문학 에이전트 켈리 팔코너(왼쪽). 한유주 작가(가운데) 역시 켈리가 영미권에 소개했다. 한국문학번역원 제공.



“장편소설 ‘고래’(2004년·문학동네)는 내가 읽은 소설 중 최고다. ‘고래’를 세계에 소개하겠으니 믿고 맡겨달라.”

2016년 말 영미권 문학 에이전트 켈리 팔코너는 한국에 있는 천명관 작가(59)를 찾아가 이렇게 설득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 5월 영국 런던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서 잠시 이야기만 나눈 사이였다. 더군다나 천 작가는 당시 문학을 그만두고, 영화계로 돌아가려고 하던 차였다.

반면 켈리의 의지는 확고했다. 켈리는 수차례 천 작가를 만나 “믿어달라”고 설득했다. 천 작가는 처음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고집스러운 요청에 점점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 원한다면 한번 해 보라”며 계약을 수락했다. 7년이 지나 ‘고래’는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천명관 작가. 부커상 심사위원회 제공.

천 작가는 2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사실 처음 켈리의 제의를 받았을 때 아무 관심도 없었다. 다른 곳에서 제안도 없고 해서 일을 맡긴 게 부커상의 시작”이라고 호쾌하게 웃었다.

“당시 소설 써서 먹고 살긴 힘들다고 생각해서 삶의 방향을 영화로 틀어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어요. 해외 에이전시가 한국 소설을 번역하려고 덤벼드는 게 이상하기도 했는데, 그냥 얼떨결에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해외에 책을 잘 소개하더라고요.”(천 작가)

켈리는 남편과 함께 아시아 문학을 영미권에 소개하는 ‘아시아 문학 에이전시’를 운영한다. 천 작가뿐 아니라 배수아 한유주 김이설 같은 한국 작가를 해외에 소개하고 있다.

문학 에이전트 켈리 팔코너. 본인 제공.

켈리는 왜 ‘고래’에 빠졌을까. 켈리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장난스러우면서도 창조적인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흔들렸다. ‘고래’는 현대 문학의 걸작”이라고 능청스럽게 예찬했다.

“천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에요. 전 ‘고래’의 유머 감각과 독특함이 너무 좋아요. 부커상이 ‘고래’에 주목한 것도 이런 소설은 세상에 없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책장을 덮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켈리)

‘고래’는 2018년 영미권 출판사 ‘아키펠라고 북스’와 출간 계약을 맺었다. 해외 출판사를 찾는 데 2년이 걸린 셈이다. ‘아키펠라고 북스’는 천 작가의 작품을 가장 잘 번역할 적임자로 김지영 번역가(42)를 골랐다. 변호사 출신인 김 번역가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년·창비)로 2012년 맨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고, 20여 년 전 아키펠라고 북스 편집자로 일한 바 있다.

김지영 번역가. 부커상 심사위원회 제공.

김 번역가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고래’ 특유의 구수함과 유머, 한국 근대 역사를 다루면서도 이야기를 박진감 있게 전개 시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며 번역을 수락한 계기를 설명했다.

김 번역가가 번역에 가장 유의한 건 유머다. 김 번역가는 “유머는 문화적 차이 때문에 자칫 건조하게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원고를 다듬으면서 계속 검토했다”며 “이렇게 쓰면 더 웃긴가, 아니면 저렇게 쓰면 더 웃긴가 고민을 많이 했다. 문체가 너무 웃겨서 혼자 컴퓨터 앞에서 낄낄 웃을 때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김 번역가는 인물명 번역에도 신경 썼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 ‘칼자국’은 직역이 아니라 ‘흉터 있는 남자’(The man with the scar)로 번역했다. 등장인물 ‘춘희’(春姬)는 발음과 뜻을 함께 써서 ‘CHUNHUI-or Girl of Spring-’라고 썼다.

독특한 건 번역가와 작가가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 번역가는 “읽을 때도 술술 읽혔고 번역할 때도 원활하게 풀렸다. 번역이 끝난 뒤 비로소 천 작가에게 연락해서 인사했다”고 했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민담, 고전소설, 설화를 많이 이야기 해주셨어요. 외할머니가 아주 익살스럽게 말씀하셔서 배를 잡고 웃은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고래’의 유머스러운 문체가 익숙하게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김 번역가)

장편소설 ‘고래’ 영문판 표지. 부커상 심사위원회 제공.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자는 다음 달 23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한다. 기다리는 마음을 묻자 3명은 각기 다른 답을 내놨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에요.”(김 번역가)

“수상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켈리)

“결과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봐야죠.”(천 작가)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