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주차장 침수땐 출입 봉쇄’ 매뉴얼 있었다면…

입력 | 2022-09-08 03:00:00

[포항 지하주차장 참사]
현행 아파트 재난대응 매뉴얼엔 ‘침수 예상시 차량 신속이동 안내’
폭우 때 차 빼려다 참사 반복돼
전문가 “비 오기前 차량 이동 공지… 폭우 시작 땐 출입금지 명시해야“



차량 뒤엉킨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 참사 현장 7일 경북 포항시 남구 인덕동 우방신세계타운1차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승용차 보닛 높이까지 흙탕물이 들어차 있다. 이 주차장은 전날 인근 하천의 범람으로 천장 가까이까지 물이 차올랐다. 관리사무소 안내방송을 듣고 차를 옮기러 내려갔던 주민 7명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숨졌다. 주민 2명은 12시간 넘게 천장 배관에 의지해 버티다 극적으로 구조됐다. 포항=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폭우로 침수된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이동시키려다가 갑자기 불어난 물에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반복되고 있다.

6일 11호 태풍 ‘힌남노’가 지나가면서 침수된 경북 포항시 아파트 2곳에서 차를 빼러 지하주차장에 내려갔던 주민 8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달 8일 수도권에 기록적 폭우가 내렸을 때 서울 서초구 지하주차장에서 남성이 고립돼 숨진 지 약 한 달 만에 똑같은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지하주차장 침수로 인한 사망 사고는 2003년 태풍 ‘매미’, 2016년 태풍 ‘차바’ 때도 반복됐다.

재해 대응 전문가들은 “부적절한 재난 대응 매뉴얼과 미비한 침수방지 시설 설치 규정 탓에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 “침수 땐 주차장 진입 금지 안내” 명시해야
7일 동아일보 취재팀이 입수한 ‘공동주택 비상상황 대응 매뉴얼’(매뉴얼)에는 “지하주차장 침수 예상 시 주차 차량 신속 이동 안내 방송 등의 조치를 취하라”고 나와 있다. 이 매뉴얼은 대한주택관리사협회가 행정안전부의 ‘지하 공간 침수 방지를 위한 수방기준’을 참고해 만든 뒤 일선 아파트 관리소에 보급한 것이다. ‘침수 예상 시’가 언제인지, 침수가 이미 진행 중인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매뉴얼은 또 “침수 피해 발생 시 필요조치 이행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며 안내 방송을 하지 않았을 경우 관리사무소가 차량 침수 피해에 책임을 질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하주차장이 침수 중인 상황에서 ‘차를 빼라’고 안내해 주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포항시 남구 인덕동 우방신세계타운1차 아파트 관리소 측은 지하주차장에 이미 발목 높이로 물이 차 있던 6일 오전 6시 반경 주민들에게 “차를 이동시키라”고 안내했다고 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은 매뉴얼이 부적절해도 무시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의 한 아파트 관리소장 A 씨는 “관리소가 ‘차를 빼라’는 안내 방송을 안 했다간 차량 침수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항의를 받을 수도 있다”며 “폭우가 내려도 차량을 빼라고 알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일정량 이상의 비가 오기 시작한 후에는 지하주차장에 내려가지 않도록 안내하라’는 내용으로 매뉴얼을 고치고 주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일기 예보상 폭우가 예상됐을 때 지하주차장 차량 출차를 공지하고, 비가 오기 시작하면 ‘지하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안내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손원배 초당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침수가 시작됐다면 지하주차장 문을 폐쇄하고 접근을 막는 등의 강제 조치가 매뉴얼에 규정돼야 한다”고 했다.




기상이변 못따라가는 방재 매뉴얼… “차수판-배수펌프 의무화를”


대비책 없는 지하주차장… 2017년 ‘지하공간 수방기준’ 확대
해일-상습위험 지구 등에만 적용… 기준 시행전 지은 건물엔 소급 못해
전문가 “과거 데이터로는 대응 한계”… 민방위 등 활용한 교육 강화 시급



지하주차장 침수 사고가 발생한 곳들은 공통적으로 차수판 등 침수방지 시설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는 아파트뿐 아니라 주상복합이나 상가 건물,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 침수방지 시설 설치 의무 지역 확대해야

2016년 태풍 차바 때는 울산 중구 태화시장 인근 주상복합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50대 여성이 차를 빼려다가 숨졌고, 2003년 태풍 매미 당시에는 상가 지하주차장 등에서 12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2020년 7월 부산 해운대구 한 호텔 지하주차장에선 폭우로 발생한 급류에 3명이 휩쓸렸다가 구조됐다.

정부는 지하주차장 사고가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 태풍 차바를 계기로 ‘지하 공간 침수방지를 위한 수방기준’(수방기준)을 개정했다. 이에 따라 2017년부터 과거 침수 피해가 없었더라도 침수가 우려되는 지역까지 지하 공간 내 침수방지 시설 설치가 의무화됐다. 하지만 여전히 적용되지 않는 곳이 광범위해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수방기준은 △자연재해위험개선지구 중 침수위험지구 및 해일위험지구 △과거 5년 이내 1회 이상 침수되었던 지역 중 동일한 피해가 예상되는 지구 △자연재해저감 종합계획에 위험지구로 선정된 지역 중 침수 피해가 우려되는 지구 등에서 각 지방자치단체가 침수 우려가 크다고 판단한 지역에 적용된다. 하지만 우방신세계타운 아파트는 상류에서 범람이 반복되는 냉천 옆에 있음에도 하류에선 침수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침수위험지구 등으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전문가들은 이상 기후가 나타나고 있는 만큼 침수위험지구를 선제 발굴해 적극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이상 기후가 잦아져 과거 데이터로는 예측에 한계가 있다. 침수 이력이 있었던 지구 근방까지 폭넓게 침수위험지구로 지정해야 50년, 100년에 한 번 오는 재해에도 대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 기존 건물에도 침수방지 시설 의무화해야

서울 서초구의 한 건물 지하주차장 입구에 설치된 차수판(위 사진)과 경기 의정부시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설치된 배수펌프. 독자 제공 

침수우려지구 등으로 지정되더라도 개정 수방기준이 시행된 2017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에는 침수방지 시설 의무화 조치가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 우방신세계타운 아파트 역시 1990년대 중반 준공돼 침수방지 시설 의무화 대상이 아니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 아파트는 지하주차장에 차수판이 설치되지 않았고, 모래주머니도 없었다. 배수구가 3곳 있었고, 사고 당시 배수펌프도 가동 중이었지만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오는 물을 감당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차수판을 주차장 외부에 설치하거나 배수펌프를 늘리는 등 큰 공사가 필요하지 않은 침수방지 조치는 기존 건물에 대해서도 일부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공 교수는 “침수 위험이 높은 곳은 지상 도로처럼 지하 공간에 일정 거리마다 배수구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수방기준을 점검해 문제가 있으면 보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 지하 공간 위험 교육 강화해야

폭우 시 지하 공간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도 유사한 사고가 잇따르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지하 공간은 폭우 등으로 물이 유입될 시 유속과 침수 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배수는 느려 위험성이 크다. 방재관리연구센터에 따르면 지상의 침수 높이가 60cm인 상황에서 계단을 통해 지하 공간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5분 40초 만에 수위가 75∼90cm까지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하주차장은 지하 공간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면적이 넓어 대피하기 쉽지 않다”며 “침수가 시작됐다면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행위”라고 경고했다.

손원배 교수는 “화재 예방 교육처럼 침수 피해 예방 교육도 주기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화재 경보음이 울리면 건물 밖으로 대피하듯 지하 공간에서도 경보 시스템을 마련하고 대피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동현 가천대 소방공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침수 피해가 빈번한 만큼 민방위 시간을 활용해 수해 방재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7일 오후 6시까지 힌남노로 인해 경북 포항과 경주, 울산에서 모두 11명이 숨졌고, 포항에서 1명이 실종됐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포항=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