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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VR 추억여행’, 우울감도 훌훌”

입력 | 2022-08-18 03:00:00

서울시, VR 활용 ‘소원여행’ 개발… 어르신 ‘추억의 장소’서 맞춤 제작
“부모님 묻힌 산 보여” 눈물 글썽… 과거 회상, 우울감 개선 인지력 높여
市, 홈페이지에 제작 매뉴얼 공개



김순복 씨와 이봉수 씨(왼쪽부터)가 4일 오후 서울 노원구 시립노원노인종합복지관에서 가상현실(VR) 기기를 착용한 채 영상을 감상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외출이 어려워진 어르신들은 이날 추억의 장소를 VR로 둘러봤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언니랑 아나고(붕장어의 일본말)를 구워 먹는 게 그렇게 맛있었지.”

4일 오후 서울 노원구 시립노원노인종합복지관. 가상현실(VR) 기기를 착용하고 영상을 보던 김순복 씨(86)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영상 속 내레이터가 “언니가 해준 음식 중 무엇이 가장 기억나느냐”고 묻자 나온 답변이었다.

VR 영상은 김 씨의 추억이 깃든 부산 자갈치시장을 보여줬다. 그는 30대 때 언니와 함께 살며 횟집을 운영하던 과거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했다. 특히 언니랑 시장 보러 나가서 함께 사먹던 음식이 그리웠다고 한다. 영상에 몰입한 김 씨는 내레이터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 올 때마다 연신 “그랬지”, “맞아, 맞아”라며 호응했다.

약 5분간의 ‘소원여행’을 끝낸 김 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부산을 가본 지 오래됐는데 이렇게 영상으로나마 생생한 모습을 보니 행복하다”고 감격했다.
○ 인생 장소로 ‘소원여행’ 떠나요
서울시는 지난달 VR를 활용한 여행 영상인 디지털 경험디자인 ‘돌이켜봄’을 개발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외출이 어려워져 우울감을 느끼는 어르신들을 위해서다. 시민들이 공공디자인에 참여하는 사업인 ‘디자인 거버넌스’에서 처음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시립노원노인종합복지관과 사회적 기업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VR 영상의 특징은 ‘개별 맞춤형’이라는 것이다. 영상 제작에 참여한 복지관 어르신 12명은 각자 인생에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을 지정했다.

이봉수 씨(86)는 어린 시절을 보낸 강원 철원군을 추억의 장소로 꼽았다. 부모님 농사를 돕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논과 부모님 산소가 있는 산 풍경이 영상에 담겼다. 6·25전쟁 피란민인 이 씨는 “열일곱 살 때 철원에 왔는데, 눈이 많이 오던 당시 풍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산의) 골을 보니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산이 맞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밖에도 젊은 시절을 보낸 청량리 청과물시장, 아버지와 소풍을 갔던 백양사 등이 소원여행의 장소로 지정돼 VR 영상으로 제작됐다.
○ 과거 행복했던 추억 떠올리니 우울감 줄어
어르신들은 복지관 및 VR 업체와의 인터뷰 등을 진행하면서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는데, 이 과정에서 우울감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VR 제작을 맡은 세븐포인트원의 이현준 대표는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회상 요법’으로 장기기억을 자극하면 우울감이 개선되는 것은 물론 인지능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인터뷰부터 영상을 만드는 것까지 모두 하나의 프로그램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VR 영상 제작 과정을 매뉴얼로 만들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제작 매뉴얼은 △팀원 구성 △추억 발굴 △추억 선정 △스토리 디자인 △VR 제작 △VR 활용까지 모두 6단계로 구성돼 있다. 어르신이 추억을 회상할 때 기록할 수 있는 ‘추억 지도’와 VR 스토리보드는 물론 인터뷰 질문 팁도 담겨 있다. 매뉴얼은 디자인서울 홈페이지(design.seoul.go.kr)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주용태 서울시 문화본부장은 “어르신들을 시작으로 하되 순차적으로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새로운 디지털 경험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