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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감소와 불황의 시대, ‘낡은 믿음’은 위험하다[동아광장/박상준]

입력 | 2022-06-25 03:00:00

인구 감소기엔 불황 극복 녹록지 않아
기업과 노조, 신뢰로 고용안정 우선해야
인구 증가-고성장 시대 불신 깨야 한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나는 아버지와 식성이 비슷한데, 그중에서도 과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버지와 같았다. 아버지는 자상한 분이어서 가족이 먹을 과일은 늘 당신이 챙겼다.

나는 50세 즈음에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예전처럼 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 오면 부모님 집에 머무는데 아무래도 평소보다 과식을 하게 된다. 게다가 아버지는 식후에 어김없이 과일을 한 접시 내오신다. 나는 혈당이 염려되어 한 조각만 먹고 마는데 아버지는 그게 무척 불만이셨다. 노년에도 성인병이 없었던 아버지는 과일을 많이 먹은 덕분이라고 믿고 계셨다. 과일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아버지의 오래된 믿음, TV에 나온 전문가의 과일 예찬으로 강화된 그 믿음이 당뇨병 환자에게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작년에 3,300을 넘었던 코스피가 2,500 밑으로 떨어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가가 폭락했다. ‘어어’ 하는 사이에 시작된 불황이 얼마나 오래갈지 아직 예단할 수 없지만 이번 불황은 한국과 같은 나라에 특히 위험하다.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시점에 덮친 세계적 불황이기 때문이다.

인구 감소로 인한 국내 시장과 노동력의 축소는 기업의 투자와 생산을 위축시키고 세수의 기반을 약화시켜 정부 재정의 부실을 초래한다. 세계 경제가 호황일 때는 해외 시장의 팽창으로 이런 약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해외 시장마저 축소되는 전 세계적 불황의 시대에는 치명적이다.

불황이 시작되면 기업은 비용 삭감을 위해 고용을 줄이려고 한다. 버블 붕괴 후의 일본이 그랬다. 하필 그 즈음에 생산가능연령(15∼64세)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노년 인구의 부양 부담이 증가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취업자가 감소하자 부양 부담을 정부가 떠안아야 했고 재정 지출이 급증했다. 일본인들은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지갑을 닫았고 시장이 쪼그라들었다. 정부 재정을 쏟아부어도 가계의 소비와 기업의 투자에는 좀처럼 반향이 없었고 일본 경제는 점점 허약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은 과거의 소득 수준을 회복하는 데 6년을 소요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취업자를 늘리고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고령화사회의 해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 시간은 줄이고 임금은 호황기에만 소폭 올렸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임금을 동결시키거나 삭감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은 임금을 올리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 임금 인상보다는 고용 안정을 추구했고 업무의 재배치나 임금피크제에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임금 협상은 큰 갈등 없이 타결되었다.

정규직 일자리는 주로 청년 구직자에게 주어졌고, 비정규직 일자리는 경력 단절 이후 노동 시장에 복귀한 여성과 정년 이후의 경력자에게 주어졌다. 인구가 감소하는 나라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일자리가 모두 늘었고, 범죄율과 자살률이 감소했다. 일본 경제가 여전히 어려운 중에도 일본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고용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노동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라는 믿음이나, 임금 인상 요구는 노동조합의 당연한 의무라는 믿음은 인구가 감소하는 시대에 위험한 믿음이다. 장년이 되어 당뇨병을 갖게 되면 청년 때와는 다른 식습관이 필요하다. 과일에는 몸에 좋은 온갖 미네랄이 가득하지만, 당뇨병 환자에게 치명적인 과당도 가득하다. 청년 때 형성된 오래된 믿음이 노년에는 위험할 수 있다. 인구 증가의 시대, 고성장 시대에 형성된 믿음 역시 인구 감소의 시대, 저성장 시대에는 위험할 수 있다.

한편 기업과 노동자가 서로를 불신하면 일자리를 지킬 수 없다. 잘 알려진 수인의 딜레마에서 두 죄수는 둘 다에게 더 좋은 선택이 가능한데도 최악을 선택한다. 서로 소통할 수 없고 그래서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과 노동자 간의 불신도 우리 사회가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낡은 믿음이다. 이제 그 믿음도 깨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는 경영자들과 낡은 투쟁의 효용을 의심하는 노동자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인구 감소와 불황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다. 어려움을 현명하게 극복하고 이 사회를 지키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오래된 믿음의 답습은 위험하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