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36〉장사의 낮잠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서 마르코는 전쟁 영웅이었지만 인간이길 거부하고 돼지가 된다. 파시스트의 참전 요구를 거절하고 은신처에서 한가로이 낮 잠을 잔다.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제공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1991년)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투 장면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스의 작은 섬에 파병된 이탈리아 병사들은 사령부와 연락도 끊긴 채 주민들과 어울려 지중해의 햇빛 아래 뛰어논다. 이런 역설적인 한가로움은 조선 중기 임제(林悌·1549∼1587) 시에서도 포착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1992년)에도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전직 공군 비행사가 등장한다. 주인공 마르코는 과거 전쟁영웅이었지만 인간이 되길 거부하고 돼지의 얼굴로 해안의 작은 섬에 숨어 산다.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은둔하는 돼지로 표현된 것처럼, 지식인 사회와 불화하던 시인의 처지가 잠자는 장사에 투영됐다. 시인도 감독도 세상에서 실현하지 못한 혹은 실현할 수 없던 바람을 낮잠 자는 형상에 담아 놓은 듯하다.
시인은 자신이 중국의 오대(五代)나 육조(六朝)시대 같은 혼란기에 태어났다면 돌림 천자라도 했을 것이라는 왕정을 깔보는 듯한 유언을 남긴 바 있다. 감독 역시 전쟁과 군대에 대한 환멸로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겠다는 다짐을 영화에 담았다.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를 선택한 영화 속 비행사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장사는 감독과 시인의 또 다른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