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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립’이라는 환상[특파원칼럼/유재동]

입력 | 2022-03-15 03:00:00

무리한 전쟁으로 경제위기 자초한 푸틴
제재와 고립 길어지면 국민 고통만 늘뿐



유재동 뉴욕 특파원


요즘 러시아 경제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다 보면 전쟁은 오직 우크라이나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웃나라를 무력 침공한 대가로 서방의 ‘제재 폭격’을 맞은 러시아는 지금 국민들의 일상 곳곳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다. 마트에서는 생필품 사재기가 벌어지고, 은행과 환전소는 현금을 확보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생긴다. 전자제품 등 수입품 가격은 일주일 사이에만 10% 넘게 치솟아 가격표를 매일 바꿔 달아야 할 지경이다.

제재는 러시아 산업의 자존심에도 깊은 상처를 냈다. 소련 시절부터 기술 자립의 상징이었던 ‘라다’ 자동차는 부품 수입이 막히자 지난주 공장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치료제가 동날까 봐 잔뜩 약을 챙겨다가 독일로 도망치듯 떠났다는 부부의 이야기도 화제가 됐다. 러시아는 당초 서방의 제재 위협이 쏟아질 때는 “할 테면 해보라”며 상당한 자신감을 과시했다. 미국 언론도 그동안 “러시아가 외환보유액을 넉넉히 쌓고 서방 의존도를 줄이는 ‘경제 요새화(fortification)’를 진행해 제재를 오래 견딜 것”이라는 식의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요새란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국민들만 상상을 초월한 고통에 내몰리고 있다.

이론적으로 한 나라가 오랫동안 고립을 버티려면 실로 완벽에 가까운 경제 구조가 필요하다. 농산물과 원자재는 자급자족에 충분해야 하고, 모든 핵심 첨단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과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내수시장이 있어야 한다. 또 어떤 충격에도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기축통화 역시 필수 아이템이다. 세상에 이 모든 걸 갖춘 나라는 찾기 힘들다. 세계 유일 경제 강국이라는 미국도 팬데믹에 글로벌 생산이 주춤하자 공급망 위기와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정권이 흔들리는 위기까지 겪었다. 요즘 같은 글로벌화 시대에 홀로서기가 어려운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특히 그중에서도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제재에 가장 취약한 나라로 꼽혀 왔다. 에너지 수출로 대부분의 외화를 벌고 주요 공산품은 수입에 의존하는 천수답(天水畓) 경제 구조로는, 외부와 무역이나 금융이 차단되면 스스로 버틸 방도가 없다. 당국이 아무리 금리를 올리고 외화 반출을 통제한들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을 거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런 허점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어가며 반영구적 자립 경제를 이루겠다는 환상을 꿈꿨다. 현실은 물론 정반대다. 제재 며칠 만에 나라는 부도 위기에 몰렸고, 고달픈 국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고 있다. ‘러시아가 제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크라이나가 빨리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이번 전쟁에 임하는 푸틴의 두 가지 결정적 오판(誤判)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 발로 나라 문을 걸어 잠그며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사례는 우리 주변에도 있다. 잇단 도발로 제재를 자초하고, 방역을 이유로 모든 교역을 중단한 채 지내온 북한 정권도 평소엔 ‘자력갱생’이라는 허망한 구호를 외치며 주민들을 속여 왔다. 무역과 기술 도입에 의한 경제 발전을 ‘외세의 노예가 됐다’고 비난하고, 핵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면서 금전적 보상이나 취해 온 북한의 현실은 지금 모두가 다 아는 대로다. 이 세상 독재자들이 ‘자립’ ‘애국’ 같은 허울 좋은 말을 내세워 외부와 담을 쌓는 진짜 목적은 자신들의 체제 유지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