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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다운 군대[임용한의 전쟁사]〈175〉

입력 | 2021-08-17 03:00:00


동학,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청년 김구는 을사늑약 이후 무장투쟁을 접고 애국계몽 운동에 투신한다. 그러나 신민회 활동 및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수감됐다. 1915년 출옥한 김구는 애국계몽 운동의 한계를 깨달았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김구는 참여를 거부한다. “만세로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

바로 상하이로 망명한 김구는 임시정부에 투신했다. 이때부터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이 된다. 김구의 꿈은 번듯한 군대, 광복군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아픈 추억이 있다. 그가 최초로 지휘한 군대는 동학군이었다. 18세로 병력 700명 정도를 거느렸던 김구는 해주성 공격에 선봉으로 참여했다. 성에는 조선군 200명과 일본군 7명이 있었다. 이 병력으로는 4곳의 성문을 다 방어하기도 힘들다. 김구가 작전을 짰다. 주력이 남문을 향해 진격한다. 이것은 양동이다. 수비대가 남문에 집중하는 사이 김구가 진짜 주력인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서문으로 쾌속 진군, 단숨에 성을 함락시킨다는 것.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이 남문에서 공포 3, 4발을 쐈다. 그러자 주력이 바로 도주했다. 김구 부대는 서문에 도착해 공격 중이었는데 퇴각 명령이 내려왔다. 오합지졸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깨닫고 병사를 조련하기 시작했다. 백범일지에 이때 상황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포수들과 총 든 사람이 제일 많아 최정예였다는 부대 수준도 알고 보면 정말 한심했다. 구한국군 장교 출신과 지략이 있는 인사를 모사로 초빙했고, 동학군에서는 좋은 평을 얻었지만 전투를 치를 수준까지 올라갔는지는 의문이다. 이 부대는 인근 동학군과의 알력으로 그들의 공격을 받아 궤멸했다.

아무리 애국심이 충만하고 무기가 좋아도 군대는 군대다워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그러려면 군은 내적으로 정직하고 건전해야 하고, 국민도 군대를 이해하고 지원해 줘야 한다. 요즘 우린 둘 다 붕괴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