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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하정민]1776 vs 1619

입력 | 2021-07-21 03:00:00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미국의 인종차별이 개개인의 편견이 아닌 사회체제 자체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비판적 인종이론’(CRT)에 대해 완전히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 역사의 과오도 인정해야 한다”며 학내 CRT 교육에 긍정적인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좌파의 세뇌 교육”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4일 245주년 독립기념일,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 6개월을 맞은 미국에서 역사 논쟁이 치열하다. 진보 진영은 미국의 시원(始原)을 독립선언문이 공표된 1776년이 아니라 흑인 노예가 미 버지니아주에 처음 도착한 1619년으로 보고 이들이 미 역사에 크게 기여했음을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특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등 일련의 건국 영웅을 일컫는 ‘건국의 아버지’ 대부분이 노예를 부렸다며 이들의 재평가 또한 불가피하다고 본다. 보수 진영은 노예제가 당시 미국에만 존재한 제도도 아닌데 시대적 상황과 맥락을 도외시한 채 공이 큰 인물에 대한 흠집 내기가 과하다며 역사 왜곡이라고 맞선다.

이 논란의 배경에 미국의 인종차별이 개개인의 잘잘못이 아닌 인종차별을 용인하고 부추기는 구조적이고 제도화된 체제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비판적 인종이론(CRT·critical race theory)’이 있다. 1970년대 일부 흑인 법학자는 로스쿨에서 “미 사회를 강타했던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많은 주목을 받았음에도 실질적 성과를 낳지 못한 것은 백인에게만 유리한 법과 사회제도 때문이다. 이를 완전히 바꿔야 인종 불평등이 해소된다”며 CRT를 주창했다. 인종차별 타파를 위해 현재의 미 정치경제 체제를 일정 부분 무너뜨리는 일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 주장의 대담성과 과격성으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CRT는 2017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 2019년 미 노예제 400년 역사를 재조명하자는 뉴욕타임스(NYT)의 탐사보도 프로젝트 ‘1619’, 지난해 5월 백인 경관의 잔혹 행위로 숨진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태 등을 거치며 미 사회의 뇌관으로 부상했다. 특히 대선을 통해 백악관 주인이 바뀌면서 전현직 최고권력자의 정쟁 도구로 변모하는 양상이 뚜렷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이념으로 점철된 1619 건국년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올바른 역사 교육을 주도하라”며 ‘1776 위원회’란 자문기구를 만들었다. 행정명령을 통해 미성년자에 대한 CRT의 학내 교육도 금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집권 직후 이 명령을 폐지했다. 그러자 텍사스, 아칸소 등 보수 성향이 강한 몇몇 주는 주법으로 CRT 교육을 금지하겠다며 맞서고 있다.

‘바이든의 입’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9일 “대통령은 미 역사에 많은 어두운 순간이 있고 오늘날에도 체계적인 인종차별이 존재하므로 아이들이 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학내 CRT 교육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틀 후 트럼프 전 대통령은 텍사스에서 열린 보수집회에 참석해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비판적 인종이론가를 물리치겠다”고 선언했다. 양측 모두 지지층 결집을 위해 내년 중간선거, 2024년 대선 등에서 주요 의제로 삼을 뜻을 분명히 해 앞으로도 상당 기간 CRT가 미 사회의 뇌관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커졌다.

CRT 찬반 진영의 대립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보수 진영은 모든 백인을 잠재적 인종주의자로 묘사하고 인종차별의 과오가 없는 현 세대 백인에게 불필요한 죄의식을 강요한다고 반발한다. 미국이 그토록 인종차별의 모순과 폐해로 가득한 나라라면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겠으며 흑인보다 먼저 미국에 도착한 아메리칸 원주민의 공로는 어떤 식으로 인정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진보 진영은 자산, 급여, 교육 수준, 평균수명 등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면에서 인종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를 시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맞선다.

양측 주장은 모두 나름의 논리, 타당성, 취약점을 지닌다. 문제는 이미 역사 논쟁을 넘어 정치 대립으로 번진 이 사안이 교실로 파고들어 어린 학생들까지 피해를 입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는 수도 워싱턴 인근의 부촌 버지니아주 라우든카운티의 학부모들이 공청회에서 CRT 교육을 두고 거세게 대립해 일부 학부모가 체포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전했다. “CRT는 새로운 트럼프” “미국에 살면서 미국을 무너뜨리겠다고 주장하려면 미국을 떠나라”는 양측의 중간 지점에 타협과 화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