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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사라진 아내… 완벽했던 삶이 부서졌다

입력 | 2021-05-08 03:00:00

◇부서진 여름/이정명 지음/376쪽·1만4000원·은행나무




완벽한 인생을 사는 남자가 있다. 아름다운 자택에서 하루 종일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산다. 미술품 경매장에선 남자의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린다. 아내는 그를 돌보고 지지하며 헌신한다. 남자는 자신이 마흔네 살이 되던 생일에 아내에게 말한다. “완벽한 하루야.”

하지만 남자의 행복은 곧 산산조각 난다. 생일 다음 날 아내가 사라진 것. 어디로 갔을까. 누구에게 행방을 물어야 할까. 남자는 아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어쩌면 남자가 그동안 숨겨 왔던 ‘그 사건’ 때문에 아내가 사라진 것일까. 오랫동안 잊고 지내려 했으나 결코 지울 수 없는 그 사건을 남자는 기억해낸다. 아내를 찾기 위해 과거의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올린다.

저자는 독자를 서서히 비밀스러운 사건의 중심부로 이끌고 간다. 조선 시대 화가 김홍도(1745∼?)와 신윤복(1758∼?)의 일대기를 다룬 대표작 ‘바람의 화원’(은행나무)처럼 속도감 넘치는 문체 덕에 소설은 술술 쉽게 읽힌다. 스릴러라는 장르는 조선 시대 훈민정음 반포 전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저자의 작품 ‘뿌리 깊은 나무’(은행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faction·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 소설로 유명하지만, 이번 작품은 현재를 배경으로 한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날씨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독자를 여름으로 데려간다. 소설 속에선 “스프링클러가 물을 뿜는 소리와 베어진 풀의 향기가 함께 밀려”오기도 하고, “태양의 고도가 기울고 곤충의 날개 마찰음이 귓전을 스”치기도 한다. 현실의 계절과 상관없이 독자는 여름의 한가운데 서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직업을 화가로 고른 것도 이 같은 미묘한 날씨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테다.

날씨는 날씨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감정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 주인공은 온화한 바람이 불어올 땐 자만심에 빠지고, 따가운 햇볕 아래선 짜증을 낸다. 한여름 한 남자의 좌절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