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동아DB
늦가을 정취를 즐기려 산을 찾았다. 꽃비처럼 흩뿌려진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댄다. 지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지만 왠지 짠하다.
산 정상과 쉼터 등에서 많은 등산객들을 만났다. 숨이 차 그랬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마스크를 턱에 걸치거나 벗은 채 ‘맨얼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맨얼굴은 ‘화장 분장 따위로 꾸미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얼굴’이다. 한데 우리 사전엔 올라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민낯’으로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다. ‘민낯 대화’를 나눈다고?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민낯 역시 언어 세계에서 의미를 확장하는 중이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라는 뜻을 넘어, 어떤 사람이나 조직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쓰인다. ‘정치(인)의 민낯’, ‘주택시장의 민낯’ 등.
그러고 보니 얼굴을 가리키는 낱말이 많다. 신관, 낯, 낯짝, 광대, 쪽이 있다. 신관과 낯이 얼굴을 점잖게 가리킨다면 낯짝과 광대는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 중 ‘쪽팔린다’고 할 때의 쪽이 가장 속된 표현 같다. 광대등걸은 파리해져서 뼈만 남은 얼굴을 뜻한다.
흔히 안색(顔色)이라고 하는 ‘낯빛’도 재미있다. 이어령 선생은 낯빛은 감추고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내면의 표정’이라고 했다. 안색보다 훨씬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언중은 안색을 기분보다는 ‘(안색이) 좋다, 창백하다’ 등 건강 상태를 말할 때 주로 쓴다.
이 같은 표현을 담은 한자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홍안(紅顔)은 젊어서 혈색이 좋은 얼굴을, 창안(蒼顔)은 창백한 얼굴을, 추안(秋顔)은 늙은 얼굴을 이른다.
가을이 어느새 야위어간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있다면, 반가운 낯빛으로 반기시길. 그나저나 우리 정치도 국민들의 낯빛을 살펴 속마음을 제대로 헤아려주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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