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조업체들은 극심한 손해를 봤다. 현재까지의 언론 보도 및 정부 자료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초고순도 불화수소를 한국 기업들에 납품해왔던 일본의 ‘스텔라케미파’는 일본 정부의 조치로 인해 당기순이익이 전년도 대비 1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기업들의 피해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와 같이 체계적인 공정이 중요한 생산품의 경우 재료의 안정적 공급 확보가 중요한 과제인데, 한국 기업들이 이미 다른 보급로를 발굴한 만큼 일본 기업들에게 다시 기회가 돌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모리타 화학공업’의 경우 한국에 수출을 재개했지만 판매량이 30%나 감소했다. 다른 일본 기업들도 한국 내 불매운동으로 많은 손해를 봤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불매운동이 거셌던 유니클로는 30%, 아사히의 경우에는 50%나 매출이 급감했다.
이 과정에 일본 정부는 명분까지 잃어버렸다. 일본 정부가 작년 오사카 G20 회의에서 자유무역 관련 공동성명을 지지한 직후 대한국 금수조치를 발표한 것은 코미디였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어긋나는 장면이었다.
일본 정부의 패착은 부족한 숙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한일 무역 분쟁의 주무부처였던 경제산업성은 치밀한 준비와 계산으로 한국 때리기를 했지만, 다른 부처들과 정책적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외무성과의 손발이 맞지 않는 장면이 연출됐다. 당시 고노 다로 외무상마저 경제산업성의 조치를 언론에서 처음 접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외무성 내부에서는 경제산업성의 무리한 조치의 뒤처리를 하게 됐다는 불만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외교관들과의 의논마저 뛰어넘고 타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급하게 결정했던 것은, 더 늦기 전에 한국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일본 정부, 특히 아베 총리의 심복들이 다수 포진해 있던 경제산업성은 ‘단기전의 신화’에 사로잡혀 반도체 관련 수출 규제로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베의 예상과 달리 한국 기업들의 손해를 이끌어내지 못한 반면, 일본 기업들은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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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일본은 북핵의 가장 중요한 이해당사자이자 그 해결을 위한 협력 파트너다. 우리 정부가 꼬일 대로 꼬인 남북관계를 회복하고 북핵문제 해결의 모멘텀을 다시 살리려면 한미일 삼각협력 체제의 복원이 필요하다.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한국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게 된다. 반면 일본이 가진 외교적 카드는 우리보다 다양한 것 같다. 역사학자 존 다우어의 유명한 표현대로 2차대전 이후 일본은 “패배를 껴안고” 미일동맹을 혈맹의 수준까지 튼튼히 구축해 놨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득세한 비주류 세력에 대한 공세적 로비도 이미 수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에게도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는 네 나라인 쿼드(Quad)의 일원이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가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과는 실로 다른 수준이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영토분쟁도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등 동북아 역내에서 일본의 외교적 공간도 늘어났다.
가능성은 낮지만, 한일 무역 분쟁이 더 악화될 경우 일본은 출혈을 각오하고서라도 한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중국·대만 등 경쟁국의 기업들에 대해 수출 어드밴티지(advantage)를 제공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밀리는 우리 기업들은 더 큰 내상을 입게 될 것이다. 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는 실질적인 카드가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이 WTO 무력화를 추진 중인 가운데 일본 또한 후쿠시마 수산물 사건 때의 사례로 WTO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한국에 유리한 결정이 나오더라도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무시할 것이다.
요컨대 한국에게 일본은 필수적이나, 일본에게는 한국의 대체재가 많다는 것이다. 일본에게는 참호전에서 요긴하게 쓸 만한 창과 방패도 있다. 좋든 싫든 당분간은 이런 불균형의 상황이 유지될 것이다. 지금과 같이 일본과의 대결구도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나중에 더 큰 사안들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술적 판정승을 거둔 한일 무역 분쟁이, 전략적 참호전이 될 경우 승부가 뒤집힐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억제와 위기관리의 투 트랙(two-track)이다. 일본 정부의 도발을 막는 한편, 전선 확대를 자제하면서 분쟁의 해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일본 정부의 공격의도는 분명히 억제해야 할 문제이다. 이른바 ‘보통국가’를 꿈꾸는 자민당의 일본을 현상타파적 국가라고 볼 여지가 있다. 금번 규제조치에 일본 우익의 야욕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금수조치가 일본에 다분히 큰 고통을 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국산화 및 판로 확보의 반작용과 불매운동의 충격량만으로도 일본은 큰 자상을 입었다.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강력한 수단들이며 앞으로도 효과적 활용이 필요하다. 동시에 성공적인 억제를 위해서는 선을 지키는 정부와 민간의 감정 자제가 중요하다. 양국에서 고조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에스컬레이션에 잘못된 판단과 적대적 열기를 누적해서는 안 된다. 작년 서울 중구청이 내건 ‘노 재팬’ 깃발에 대한 시민들의 철거 요구와 관철은 한국 사회의 진정성을 증명한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비도덕적인 금수조치를 규탄할 뿐 호전적 민족주의에는 반대한다는 정밀 타격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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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분쟁에 대해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는 기술 개발과 보급선 다변화에 기반한 공급측면의 대처와 함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수요측면의 타격이다. 이와 함께 일본이 거는 전쟁에 반대하는 합리적인 시민의식과, 치닫는 대결을 막아내는 적극적인 유화책이 필요하다. 2차대전 시기 영국이 내걸었던 유명한 구호 ‘Keep calm and carry on(차분함을 유지하며 해야 할 일을 하라)’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한국 정부에게도 지혜를 주는 시점이다.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