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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권만 빼고 다들 익숙해진 ‘북핵 노딜’[오늘과 내일/이승헌]

입력 | 2020-02-11 03:00:00

‘뉴 노멀’ 되어버린 북-미 교착… 현실부정 ‘정신승리’ 외교 안 돼




이승헌 정치부장

설마 했지만 실제로 그럴 줄은 몰랐다.

4일(현지 시간) 밤 미국 워싱턴 의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 어디에서도 북한이나 한반도는 나오지 않았다. 연두교서는 보통 국내 이슈에 집중하는 데다 특히 11월 대선이 있는 만큼 북핵은 살짝만 언급할 줄 예상했는데, 아예 원고에서 빠진 것이다. 김정은이 지난해 말 당 회의에서 ‘충격적 행동’에 나서겠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2018년, 2019년 연두교서에서 연달아 북핵을 자신의 핵심 외교 치적으로 삼으려 했던 트럼프다. 왜 그랬을까. 8일 미 행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미국의소리(VOA) 대담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고 그 속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북한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진행자)

“잘되지도 않는 것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나? 트럼프 자신이 극적으로 부풀려 놓았지만 결과는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제임스 쇼프·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

―북한도 이렇게 예상했을까.(진행자)

“언급이 되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비핵화 대화는 미 대선이 끝나고 새 대통령이 취임한 뒤인 2021년 봄에나 재개되지 않을까 싶다.(스콧 스나이더·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

미 행정부가 돈을 대는 매체에서, 그것도 외교가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사람들의 말이 고스란히 방송됐으니 백악관의 속내는 이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난해 말만 해도 2020년 상반기 중 3차 북-미 정상회담 추진설이 한미 외교가에 나돌던 상황과는 분위기가 거의 180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은 북-미 비핵화 대화 재개 가능성을 더욱 줄이고 있다. 지난해 말 ‘정면돌파전’을 선언하며 핵 개발과 자력갱생을 강조한 김정은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전염병 사태로 당분간 집안 단속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대외 무역의 90%가량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신종 코로나로 교역은커녕 북-중 국경을 폐쇄하기 급급한 상황. 한국은 지난해부터 계속 무시해 온 데다 이번엔 개성 연락사무소까지 잠정 폐쇄했다.

이런 상황이 가장 답답하고 황당한 건 문재인 대통령일 것이다. 이런 기류를 몰랐는지 무시했는지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의 답방을 재요청하고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해 북한 비자를 통한 개별 관광을 추진하려 했다. 여기에 예상치 않았던 글로벌 보건 변수까지 터졌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연두교서 이후 올해 북핵 문제에 대한 스탠스를 바꿀지, 그대로 유지할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신종 코로나가 잠잠해지기 전까지는 당장 밝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진정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북-미 정상의 시그널과 우리의 4월 총선, 이미 시작돼 11월까지 내달릴 미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까지 고려한다면 북핵은 당분간 노딜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합리적 관측이다. 문 대통령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북핵 대화의 교착 상태가 뉴 노멀(New Normal)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게 현실이다.

여권 일각에선 총선을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비핵화 대화가 재개되기를 바랄 것이다. 10일 새해 들어 처음 열린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도 우리는 미국 측에 대북 개별 관광은 인도주의적 차원인 만큼 다시 한 번 협조를 당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사자들이나 주변 여건이 도저히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만 집착하듯 비핵화 대화를 외치는 건 공허하다. 국제사회에선 이런 청와대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도 있다. 물론 교착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 아는(知止)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